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면서요?

가장 위대한 유산

by 블루비얀코

2010년 2월 10일, 설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남편의 북경 특파원 부임으로 북경에 살고 있을 때였다. 집밖에서 들리는 요란한 불꽃놀이 소리를 들으며, 엄마 생각이 나 친정집에 전화를 했다.


”아버님이 산책 나가셨다 넘어지셔서 다들 응급실에 가셨어요. 어떠신지는 모르겠어요.” 올케가 전화를 받으며 믿을 수 없는 소식을 전했다. 이내 어머니, 작은 동생과 전화가 연결되었으나, 다들 당황한데다가 응급처치를 거들어야 하는 상황이라, 제대로 아버지의 상태를 설명해주지 않았다. 설마 큰 일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 아버지의 빠른 회복을 기도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큰 동생과 연락이 됐다. “목디스크가 크게 손상되셔서 사지를 못 움직이셔. 오늘 중으로 긴급수술을 받아야 한데.” 믿기지가 않았다. 어떻게든 수술실에 들어가시기 전에 아버지 얼굴을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그 즉시 공항으로 가,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병원서 만난 엄마는 완전히 탈진한 상태였다.


수술 후, 병실을 방문한 주치의에게 물었다. 운동신경 회복이 얼마나 가능하실까요?“ “아마 수저를 쥐시기 힘들겁니다. 이 수술은 휠체어를 타기 위한 목적이 큽니다. 다시는 보행은 어려우실 겁니다. 신경이란게 손상은 쉬워도 회복은 매우 느리게 진행되서요. ”


그로부터 11년이 흘렀다. 아버지의 몸의 상태는 사고 초반에 비해 크게 호전되지 않은 상태다.


골절된 3.4번 경추가 위치한 목 위의 기능은 완벽하시다. 그러나 목 아래에서 혼자의 힘으로 가능한 움직임은 팔로 얼굴 가려운 곳을 겨우겨우 긁으실 수 있는 정도. 그 밖의 모든 움직임은 타인의 힘에 의존해야 한다.


수술 후 초반 6개월을 재활병원서 재활을 받으시며 운동을 하셨지만 큰 변화는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신 후, 줄기세포치료, 경락 마사지, 중국 침, 벌침까지 가능한 방법은 기대를 가지고 시도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한때는 보행 용 워커에 의지해 본인 힘으로 열발자국 정도를 떼실 수 있는 때도 있었다. 그런데 그 정도에서 더 이상 호전되지가 않았다. 좋아지려 하면 몸살이 오고, 좋아지려 하면 욕창이 심해져 더 이상 운동을 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가면서, 점점 할 수 있는 움직임이 줄어들어, 지금은 일으켜드려도 앉거나 서서 버티시는 것은 불가능 해져버린 상황이다.


아버지의 상태가 이러하니, 간병을 하고 있는 엄마의 고됨은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새벽 6시에 기상, 하루 네 번의 소변빼기, 기저귀갈기, 아침 저녁 세수, 양치와 하루 세끼 밥먹이는 것은 기본, 약 먹이기, 귀파기, 코파기, 머리긁기에 TV채널 돌리기까지 아버지 일상에서 필요한 모든 움직임을 도맡아 하고 계신다.


일주일에 두 번, 움직이지 못하는 아버지의 몸을 리프트에 실어 욕실로 이동시킨 후, 목욕을 시켜야 청결이 유지되고, 일주일에 한번은 무력해진 아버지의 장을 엄마 힘으로 밀고 쓸어내려 관장을 해내야 한다. 게다가 아버지가 배탈이라도 날 때면, 하루 세번, 네번 기저귀를 갈아내야 하고, 욕창증세가 나타나면 욕창치료용 테이프와 약을 발라 관리를 해야 한다.


중.고등학교 시절 배구선수를 하셨던 아버지는, 신장 178 cm, 몸무게는 80킬로그램이셨다. 지금은 60킬로그램 중반이 되었다. 그런데 이 몸이 마치 막대처럼 굳어져 전혀 힘을 쓰지 못하니, 기저귀를 갈려고 아버지 몸을 이리저리 옮기거나 일으킬 때면, 아버지 몸통크기만한 통나무의 무게를 감당해 내야 한다.


물론 출퇴근하는 간병인이 계셔 도와주시지만, 11년 간병을 하시느라 엄마는 이가 다 빠지고 만성 입마름병과 관절염에 시달리신다. 엄마까지 탈이 날까봐 요양원도 알아봤지만 아버지의 경우 장애가 너무 심해, 제대로 간병을 할 수 있는 요양원을 찾기가 힘들었다.


부모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 아팠다.


아버지는 30년 가까이 한전에 철탑을 납품하는 작은 기업체를 운영하셨다. 조심스러운 성격이시라 사업으로 크게 돈을 벌지는 못하셨지만, 평생 큰 부침 없이 사업을 운영하셨다. 대신 가족들과 여행, 외식을 하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고 사셨다. 사고가 나기 2년 전 사업을 정리하시고 은퇴하신 후, 여행을 다니며, 손주재미에 푹 빠져 계셨다.


엄마는 8남매 맏며느리로 시집와서, 시부모를 30년 모시고, 남편사업 뒷바라지하며, 시동생들까지 보살핀 집안의 기둥이었다. 일년에도 몇 번씩 30여명의 집안손님을 불러 제사, 시부모 생일 등 행사를 치르셨다. 사람은 제 할 도리를 해야 발 뻗고 잘 수 있다며, 늘 아내, 엄마, 며느리로 책임을 다하고 사셨다.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을 좋아해 늘 남에게 베푸셨고, 시부모를 모시면서도, 남이 밥 벌어먹는 자리를 뺏으면 안 된다고, 할아버지 소유의 작은 건물을 작은 아버지들에게 양보하시기도 했다.


결혼한 딸이 어쩌다 와서 남편, 시댁 험담이라도 꺼내려고 하면 절대 같이 거들지 않으시며, 남편, 시부모한테 잘 하라고 하시는 분들이셨다.


그런데 왜? 이렇게 사신 내 부모님들에게 이게 무슨 청천벽력이라는 말인가? 착하게 살면 복을 받고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고 하지 않았나? 신이여! 당신은 어찌하여 이런 고난을 허락하고 침묵하고 있단 말입니까?


부모님의 고난 앞에서, 아버지의 무거운 몸을 들어 드릴 수도, 바지를 내리고 대소변 수발을 들 수도 없는 힘없는 딸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절망에 빠져 있는 부모님을 위해 기도하며, 질문에 대해 답을 구하는 것 뿐이었다.


고난과 관련된 책은 눈에 띄는 대로 구해 읽었다. 성경가운데 고난의 장이라는 욥기를 읽고 또 읽었다. 예배가 끝나고 나면 교회서점에 들러 고난과 광야 관련 신간들은 모조리 다 사서 그날 다 읽었다.


그 책들은 거의 비슷한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고난은 축복의 다른 이름이다. 고난을 통과하면 불순물이 없어지고 순금이 되어 나온다. 광야에서는 모든 걸 내려 놓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가는 거다.


그런데 이 메시지가 크게 위로가 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이 어떻게 축복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아버지가 다시 일어나실 희망은 점점 더 사라져가는데….


어느날 우연히 온라인서점 서평을 통해 ‘빅터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라는 책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날 이후 부모님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달라졌다.


이 책은 의사이며 철학자인 빅터 프랭클이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어 수용자들을 관찰하며, 인간 여러 군상을 발견하고, 인생의 의미에 대해 느낀 것을 글로 쓴 책이다.


그에 의하면, 수용소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들은, 나치가 아니라, 수용자 중 차출되어 나치에 편에 서서 수용자들을 학대하는 역할을 맡은 카포라고 부르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반면, 수용자들 중에서는 조금씩 배급되는 빵을 아픈 동료를 위해 나눠주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 사람들은 가혹한 수용소의 환경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으며,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라고 썼다.


‘사람이 자기 운명과 그에 따르는 시련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아가는 과정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삶에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폭넓은 기회를 제공한다. 그 삶이 용감하고, 품위 있고, 헌신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아주 극소수의 사람이 그렇게 지고한 도덕적 수준에 도달할 수 있는 영혼의 위대함을 가지고 있다.’


이 대목을 마주하는 순간 갑자기 가슴속에 뜨거운 것이 느껴지더니 설명할 수 없는 눈물이 터져 나왔다. 책을 잡고 한참을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또 울었다.


지난 11년을 살아 오고 있는 아버지.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사고 후 지금까지도 하루 2시간에서 4시간 동안 신문을 보신다. 1면부터 마지막 사설까지 놓치지 않고 읽으신다. 그래서 인가 아직도 아버지 특유의 명철함과 예리함을 유지하시며 시사문제의 여러 중요 쟁점에 대해 말씀하신다.


한번은 좋은 공부, 많은 경험을 하고도 애들 키우느라 살림하며 사는 딸이 안타까우신지, 기업들이 여성 사외이사를 많이 찾고 있다는 신문기사를 서랍에 보관하셨다가, 꺼내 보고, 꼭 지원해보라고 하셨다.


다섯명의 손주들이 왔다 갈때마다, 어머니에게 지갑의 돈을 꺼내 쥐어 달라고 하시고, 지폐가 겨우 쥐어지는 오그라든 손으로 용돈을 직접 쥐어 주신다.


미세먼지가 심해지자, 손주들 건강걱정에, 신문광고에 나오는 마스크를 여러 박스 사게 하셔서, 삼.남매 집집 마다 나눠 주셨다. 덕분에 코로나 유행 초반 마스크가 동이 나 힘들었을 때 아버지 덕을 톡톡히 보았다.


그랬다. 불의의 사고가 아버지의 몸은 불구로 만들어 놓았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책임감 있는 시민, 아버지, 할아버지로서의 사랑을 내어 주는 삶을 살고 계신 거였다.


엄마 또한 내가 무너지면 자식들이 고생한다는 책임감으로, 단 한 번을 말이라도, 난 못하겠으니 너희가 맡아라 하신 적이 없다. 아버지 식사도 정성껏 챙겨드리고, 힘든 간병에 자신이 쓰러질까봐, 예전과 달리 좋은 음식 골라 드시고, 매일매일 수영도 하신다.


자식 손주가 놀러 오면, 아직도 특유의 솜씨로 세상에서 가장 맛이 있는 밥상을 차려 주신다. 김치며 밑반찬해서 갈 때마다 싸 주시고, 세일해서 샀다며 철마다 손주들 옷가지를 챙기신다.


사춘기를 맞아 힘들어하는 손자를 위해 사랑의 손편지로 위로해주시고, 본인은 아버지 간병하느라 제대로 여행 한번 못 가도, 자식들 휴가 갈 때마다, 부적이라며 ‘안전여행’이라고 쓰신 금일봉을 내미신다.


그러면서 어렵고 힘든 건 우리가 다 때우니, 너희들만 무사무탈하면 좋겠다고 하신다.


그렇게 11년을, 부모님은 본인의 운명을 한탄하고 실의에 빠져 인생을 포기하기 보다는, 가족들에 대한 사랑으로 아우슈비츠에서도 극소수의 인간만이 가능했다는 책임을 다하는 존엄한 삶을 살고 계신 거였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니, 흡사 아우슈비츠 생존자들의 후예와 같은 용기와 자긍심이 내 안에서 샘솟는 것을 느낀다. 어려울 때마다 고생하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내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버틸 힘이 생긴다. 인생 고비 마다 찾아올 지도 모르는 시련의 상황에서 나도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답을 알 것 같다. 그리고 우리 부모님이 하셨으니, 그 피를 물려 받은 나도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이 이야기를 내 아들들과 또 그 자식들, 그 다음까지도 유산으로 물려줘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며칠 전, 호기심이 발동해, 새로 배운 나물조리법을 알려주시는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만약에 누군가가 11년전 아버지 사고날로 돌아가서, 당신이 앞으로 이 힘든 시간을 감당한다면, 당신의 후손들이 강해지고 용기 있는 삶을 살 것이고, 아니라면 약하게 어려운 고비마다 넘어지는 삶을 살거다.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 라고 묻는다면, 엄마는 어느 쪽을 택했을 것 같어?” 라고 조심스레 물었다.


엄마는 단 일초의 고민도 하지 않으시고 대답하셨다. “당연히 고생하는 삶이지.”


나는 세상 가장 값진 교훈을 삶으로 살아 보여주신 자랑스런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그리고 그런 부모님들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는 삶을 살리라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