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빛을 찾아주는 이야기, 영혼을 기울어지게 하는 이야기
나는 드라마 도깨비의 김은숙 작가의 팬이다. 그는 ‘이질적인 것들의 만남’, ‘가장 높고 낮은 것들의 결합’이라는 감동적인 ‘스토리텔링의 핵심 구조’를 잘 알고 있는 듯하다. <파리의 연인>, <시크릿 가든> 그리고 <도깨비>까지, 그 설정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드라마 속 화제 장면과 주옥 같은 대사들이 있지만, 유독 내 마음에 남는 장면이 있다.
<시크릿 가든>의 주인공 재벌 아들 김주원이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스턴트우먼 길라임과 결혼을 하겠다고 하니,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야 이 녀석아 너는 왜 그렇게 이기적이냐. 집안 생각은 안 해? 어떻게 처음부터 니가 사랑하는 여자랑 살려고 해! 나는 집안을 위해 세번 결혼하고, 네번째에 겨우 내가 사랑하는 여자와 산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걸 이기적이라고 표현하다니! 사람의 입장과 시각이 참 다르구나, 또 그런 집안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문제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아빠들이 아이들과 대화도 많이 하고 살뜰히 챙기지만, 내가 자랄 때만 해도 아이들을 키우는 건 모두 엄마들의 몫이었다. 우리집도 그랬다. 게다가 아버지는 말수가 적고 과묵한 분이셔서, 한 번도 아버지와 긴 대화를 나누거나, 품에 안겨본 기억이 없다.
엄마와는 달랐다. 딸이 혼자라 엄마와는 친구 같은 사이다. 남한테는 못하는 마음 속 이야기도, 서로에게는 솔직히 털어 놓는다. 30년 시아버지를 모시고 살면서 스트레스 받을 때, 성격이 다른 아버지와 살면서 힘들 때면, 엄마는 나에게 하소연을 하셨다.
우리집은 어릴 때부터 엄마가 대장이었다. 아버지는 꼼꼼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이신 반면, 엄마는 스케일이 크고 추진력이 강한 여장부의 성격을 가지고 계셨다. 자연히 오랫동안 나의 영웅은 엄마였다. 엄마 닮은 흰 피부와 추진력은 나의 자랑이었고, 아빠 닮아 조심스럽고, 고지식한 건 콤플렉스였다.
퇴사를 하니, 수지 친정집에 자주 갈 수 있어 좋았다. 가도, 누워 계신 아버지와는 잠시 인사만 하고, 엄마와 한참 이야기하다 돌아오곤 했다.
그런데 올해 초, 아버지가 컨디션이 조금 안 좋아지셨다. 어쩌면 아버지와 마음 속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찾아가 아버지 침대 옆에서 성경책도 읽어 드리고, 조금씩 이야기를 시도했다.
어릴 적 이야기, 학창시절 이야기, 사업하시던 이야기 등, 아버지와 아버지 인생에 대해 처음으로 직접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아버지는 학창시절 공부 잘 하는 엘리트 수재셨으며, 유명 운동선수로 지역 여학생들의 인기를 한 몸에 얻은 '킹카'셨다는 걸 알게 됐다. 또한 아버지의 인생에도 여러 고비가 있었으며, 그 상황에서도 아내와 자식들을 위해 오랫동안 힘들게 버텨 오셨다는 걸 알게 됐다.
장난기가 발동해 “아버지, 왜 어릴 적에 저 한 번도 안아 주시지 않으셨어요? 왜 사랑한다고 말해주시지 않으셨어요?” 라고 물었다. “옛날에는 다 그랬어.” 하신다. “그럼 지금이라도 해주세요.” 했더니 “사랑해~.” 하시며 움직이기 어려운 팔을 뻗어 나를 안아 주셨다.
마치 한쪽으로 굽어져 있던 몸이 바르게 쭉 펴지듯, 기울었던 나의 영혼이 빛을 찾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젠 아버지 닮아 조심스럽고 고지식한 게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조심을 한다고 하지만, 살면서 무심코 남편과 시댁 식구들에 대한 불평이 터져 나올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느끼는 건, 아이들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사실이다. 나의 반쪽자리 이야기가, 아이들 마음속 다른 반쪽을 차지하고 있는 남편의 존재에 상처를 내고, 아이들의 영혼을 기울게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급히 수습을 한다.
디지털 미디어의 시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면, 영리한 알고리즘이 내 입맛에 맞는 뉴스와 이야기만 골라서 배달해주는 시대가 됐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점점 더 자신과 익숙한 세상이 전부라고 믿는 듯하다.
오늘 내가 믿고 있는 이야기, 하고 있는 말이 혹시 반쪽자리가 아닌지. 그래서 그 말을 듣고 있는 다른 누군가의 영혼을 기울어지게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