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비 에세이스트 J Sep 05. 2024

두 개의 마이너스는 하나의 플러스를 만든다

영화<난 엄청 창의적인 뱀파이어가 될 거야, 2023>

제목에서 벌써 모순이 느껴지는 이 창의적인 작품은 캐나다 퀘벡 출신의 여성 감독인 아리안 루이 세즈의 첫 번째 장편 영화이다. 뱀파이어와 휴머니스트를 조합하여 지금껏 나온 그 어떤 뱀파이어 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신선함을 주는 이 작품은, 기존의 뱀파이어 물이 보여준 관습적이고 구태의연한 설정 대신 뱀파이어와 인간의 경계에서 본질을 고민하는 새로운 유형의 캐릭터를 등장시켰다. 


다만 제목의 지나친 친절함으로 인해 어찌하여 뱀파이어가 휴머니스트가 될 수도 있는지에 대한 단서가 쉽게 드러난다는 점만이 조금의 아쉬움을 던져 준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는 몇 가지 생각해 볼만한 지점이 존재한다. 그것을 들여다본다.



너의 없음을 지녔다는 것


우리가 누군가를 발견하여 그 사람을 의미 있는 존재로 내 인생에 수용하는 데에는 어떤 기재가 작동하는 걸까? 무엇이 그 사람을 발견하게 하고 무엇이 그 사람을 내 인생에 머물게 만드는 걸까? 그런 사람은 내 인생을 어떻게 변화시킬까?



이 작품의 두 주인공은 뱀파이어인 사샤와 고등학생인 인간 폴이다. 사샤는 뱀파이어지만 인간을 죽이려는 마음대신 인간에 대한 동정이 가득하고, 폴은 인간이지만 인간다운 삶을 누리지 못한 나머지 죽음을 갈구한다.


그러니 자연스레 둘에게는 실존적이자 실제적인 문제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사샤는 살인을 거부하면서도 피를 마시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고, 폴은 죽음을 갈구하지만 실현까지의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두 주인공에게 내재된 욕망과 현실사이의 간극은 해결책의 결핍으로 절대 좁혀지지 못할 것이었지만 어느 순간 이 상황은 180도 달라진다. 


이 둘이 서로를 알아본 순간 둘은 서로에게 결핍된 해결책이 되었기 때문이다.


관계에 있어 끌림보다 중요한 것은 지속이고, 지속을 위해서는 근본적인 유인책이 필요하다. 동성 간 혹은 집단적 관계는 흔하게 공통적 관심사나 공통적 속성으로 시작하여 신뢰를 전제로 이루어지는 반면, 이성 간의 관계는 서로의 이질적 속성, 즉 서로의 결핍된 속성을 지닌 상대에 대한 이끌림으로 시작되어 공통의 세계를 형성해 나간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사샤의 뱀파이어답지 않은 풍부한 감정은 타인에게 늘 상 괴롭힘을 당하는 폴에게는 없는 이질적인 것이며, 날 때부터 죽음을 원했다는 폴의 바램은 인간의 죽음에 대해 비애를 느끼는 사샤에게 없는 이질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극단적 이질성은 모순되게도 서로의 삶을 구원할 유일한 통로이자 서로를 이어주는 끈이 되어 두 사람을 공고하게 묶어준다. 이 영화는 이처럼 알랭 드 보통 식의 운명적 낭만주의를 채택하여 결핍을 부족함이 아닌 상대를 불러내는 필요충분의 전제로 사용함으로써 기존의 여타 뱀파이어 물과의 차별점을 보여준다.     


윈윈을 위한 진화


내가 성장한다는 것은 내가 속한 틀 내에서의 발전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정작 내가 원하는 성장이 그 틀을 거부하고 싶다면 어찌해야 할까? 평생 속해있어 다른 대안을 생각해 낼 수 없다면 나는 나의 욕망을 강압적으로 눌러야만 할까? 틀을 벗어난 성장은 가능할까?

사샤와 폴의 서사를 두고 성장영화로 보는 시각도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이들의 성장을 협소하게 분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던 방식 그대로의 틀을 유지하며 성장한 것이 아니라 그 틀을 벗어나 전혀 다른 새로운 틀을 만들고 그 틀에 맞는 새로운 생존 방식을 창조해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영화의 원제목에도 없는 ‘창의적인’ 이라는 국내 제목은 매우 적합하다.      


성장(growth)과 진화(evolution)는 발전을 이룬다는 점에서는 분명 공통의 의미를 지니지만 성장이 기존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좀 더 양적인 성격을 갖는다면, 진화는 자주 기존의 틀을 벗어나 본질과 구조에서의 변화, 즉 질적인 성격을 의미한다. 


그러니 사샤와 폴의 마지막 모습은 분명 성장이 아닌 진화를 보여준 것이며 그 진화를 통해 그들은 새로운 종, One of A Kind가 된 것이다.     

 


뱀파이어가 어떤 존재인가? 사람을 죽여서 육체를 먹는 존재인가 아니면 피를 먹는 존재인가? 폴을 만나기 전까지 사샤는 사람의 피를 얻기 위해서는 당연히 사람을 죽여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살아있는 사람의 몸에서 피를 뽑는 과정은 인간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폴을 만난 후 어떤 인간들은 여러 이유로 인해 죽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녀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살인을 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된다. 


폴 역시 외롭고 고통스러운 삶을 끝내는 것은 오로지 죽음뿐이라고 생각해왔으나 사샤를 만나 죽음을 통해 오히려 인간으로 살 때보다 충만하게 살아갈 방법이 있음을 깨닫는다. 이 둘의 결합은 서로의 실용적 필요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궁극적으로는 잔인무도한 뱀파이어의 본질을 바꾸어 인간보다 더 인간적으로 보이는 새로운 뱀파이어로 이들을 진화시켰다. 진화는 이처럼 때로는 실질적 필요로 이루어진다.      


뱀파이어가 나오는 식상한 영화 한 편이 아닌 인간성에 대한 고민과 고전적 낭만까지 품고 있는 창의적인 시나리오가 기반이 된 영화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관객의 시간을 요구하기에 충분하다.       

  







작가의 이전글 사랑의 정수, 부분 집합이 아닌 교집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