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번째 여자 - 5
추억이란 무엇일까?
오랜만에 예전에 자주 산책하던 동네를 찾았다. 길은 여전했지만 익숙하던 상점 몇이 사라져 버렸다. 좁고 분주한 길에 커피 향을 불어넣어 나를 멈춰 세웠던 작은 카페자리는 직접 키운 채소를 판매하는 동네 사랑방이 되어있었고, 늘 손님이 없어 부러 한번 들렸던 작은 수제 샌드위치가게는 예상대로 혼술집이 되어 있었다. 이 길은 나에게 추억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추억이 담긴 장소도, 함께 추억을 만든 사람도 모두 내 곁을 떠났으니 이 길은 특별함을 상실하고 그저 길이 되었다. 과거에 그랬었다는 흔한 기억, 점차 흐릿해지다 기억 속에 잠들어 있다는 것 자체를 기억해내지 못할 여러 대상 중 하나가 된 것이다. 이 길은 여전할 것이고 나 역시 여전하겠지만, 길은 달라졌고 그때의 나도 사라져 버렸다.
추억은 보통 기억과 구분되어 사용된다. 나의 경우 추억은 기억이라는 물리적 사실에 감정이 더해진 현상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면 나에게 있어 추억은 내 삶의 한 시점에 발생한 하나의 사건 혹은 발견이 나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감정을 유발하고, 이 전체의 과정이 하나의 사진처럼 각인되어 축적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그 사건과 발견이 추억이 되려면 발생한 사건의 대상 혹은 내가 발견한 대상이 현재 시점에서 유의미해야만 한다. 그 대상의 유무는 상관이 없지만 그 대상이 현재에도 여전한 의미를 지니며 내 안에 자리한 과거의 나를 보듬어주는 온도를 유지할 때라야 비로소 추억이 되는 것이다. 나에게 추억은 이러한 것이다.
추석이 다가오니 엄마가 분주해지셨다. 부엌에는 나물이 들어서고 엄마의 저장창고에는 고기와 생선이 자리를 차고앉았다. 그래도 할머니가 계셨던 그때만큼 부엌이 좁아질 일은 없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후부터는 아빠의 형제들이 각자의 집에서 추석을 보내기로 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추석은 순전히 우리 가족만의 행사가 되었다. 이렇게 행사가 축소되다 보니 자연스레 추석을 위해 장만하던 여러 음식들이 사라지거나 완성된 형태로 마트에서 공수되었다. 그 음식들 중 맨 앞에 있는 것이 송편이었다.
"여자들 다 모여라, 할머니가 부르신다."
할머니가 계시던 그 시절 할머니는 언제나 송편을 본인이 손수 만드셨다. 추석이 오기 한참 전부터 방앗간에 가져갈 쌀을 준비하고 봄에 뜯어다 말려서 냉동실에 보관한 쑥과 솔잎을 챙기셨다. 추석 전날이 되면 쌀을 야무지게 카트에 담아 단골 방앗간으로 가셔서는 가루로 빻는 전 과정을 직접 지켜보신 후 다시 카트에 담아 끌고 집으로 오셨다. 무거우니 차에 실어 나르자는 아빠의 제안은 당연히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절약이 몸에 밴 할머니가 절대 허락할 일이 없는 휘발유의 낭비였으니 말이다.
추석이 되면 본격적으로 할머니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아침부터 여러 음식을 지휘하거나 만드셨지만 절대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않고 직접 만드셔야 하는 음식이 송편이었다. 사실 그 누구에게 만들라고 했다 쳐도 할머니만큼 송편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없기도 했다. 할머니는 아침밥을 먹기가 무섭게 송편반죽 만들기에 돌입하셨는데 빻아온 쌀가루에 미리 그라인더로 갈아 놓은 쑥을 함께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하는 익반죽이었다. 나 같은 사람은 물의 온도가 어떻게 맛의 차이를 내는지는 지금도 모르지만 할머니는 음식에 관한 한 방대하고 확고한 지식을 갖고 계셨다.
그럼 얼만큼의 송편을 했었을까. 아빠만 해도 7남매였고, 그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한 집당 적게는 둘, 많게는 넷을 낳아 데려왔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우리 집에 모여 앉아 떠들썩하게 보냈을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가. 게다가 할머니는 음식에서만큼은 늘 부족함을 죄악시하시던 큰 손이셨으니 반죽의 양은 상상이상이었다. 그러니 할머니가 매번 반죽을 하셨던 그릇은 그냥 평범한 크기로는 턱도 없었다. 어린아이 둘이 들어가서 목욕을 해도 충분한 크기의 대형 고무다라가 할머니가 애용하시던 반죽 그릇이 된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김장철에나 등장하는 이 거대한 다라에 허리를 숙이고 젊은 사람도 힘들어서 못하는 반죽을 한 시간 가깝게 해야 할머니가 원하는 질감의 반죽이 완성되었다. 힘드시니까 도와주겠다고 아무리 말씀드려도 니들이 하면 힘드니까 내가 해야 한다며 혼자서 묵묵히 반죽을 하셨다. 이렇게 힘겨운 반죽이 끝나면 송편 만들기의 반이 지나간 셈이었다. 완성된 반죽 다라가 한쪽으로 치워지기 무섭게 할머니는 송편에 들어갈 깨고명을 만들기 시작했다. 사실 깨고명 역시 며칠 전부터 준비가 필요한 일이었다. 우선 질 좋은 깨를 사는 일이 중요했다. 여러 집을 들러 마음에 드는 국산 깨를 구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들인 깨는 여러 차례 깨끗하게 씻어서 말린 뒤 볶아야 한다. 다행히 깨를 볶는 일은 내가 도와드릴 수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태우지만 않으면 되는 비교적 쉬운 일이어서 나같이 서툰 사람도 해낼 수 있었다. 다 볶아진 깨는 곱게 간 후 흑설탕과 황금비율로 섞여 그릇에 담겼다. 물론 고명이 들어갈 그릇의 크기도 거대했다.
"얘들아, 다들 다라에 둘러앉자. 할머니가 밀대로 미실 거니까 우리 둘은 반죽을 동그랗게 만들어서 할머니 드리자. 그리고 너희 셋은 반죽에 고명을 넣어줘. 너는 완성된 송편을 쟁반에 차례대로 담아서 다 차면 큰 엄마 드려."
이것은 나다. 우리 아빠가 집안의 장손이고 내가 그의 장녀니까 당시 나는 맏언니로서 사촌동생군단을 조직적으로 이끌어 송편 만들기 작전을 수행해야 했다. 다행히도 작은 아빠 두 분이 딸들을 많이 낳아주셔서 명절날 일손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책임감에 충만한 맏언니와 너무 착한 사촌동생들은 그렇게 송편명장이신 박영애여사님의 지휘하에 생산자의 출처가 너무도 명확한 개성 넘치는 저마다의 송편을 만들었다. 완성된 송편은 곧바로 가스레인지 위에서 이미 예열된 채 대기하던 커다란 솥으로 직행했고, 솔잎이 촘촘히 깔려있는 그 솥 안에서 맛있게 삶아졌다. 물론 이 송편은 열심히 땀 흘려가며 만든 박영애여사님과 나머지 여인들의 입으로 가장 먼저 전달되어 사라졌다.
"엄마, 오늘 마트가시면 송편 꼭 사 오세요. 깨고명만 사 오셔야 해요."
추석이 왔다. 할머니가 떠난 후 열 번이 넘는 추석을 맞이했는데도 이상하게 내가 추억하는 것은 한참 전의 것들이다. 송편하나 만들자고 한 달이나 준비하던 할머니의 모습, 함께 다라에 둘러앉아 왁자지껄 수다를 떨던 사촌 동생들, 막 익은 송편을 꺼내어 급하게 한입 물다 깨고명이 터져 나와 입안을 데고도 깔깔거렸던 모두의 모습만이 내가 추억하는 추석의 모습이 되었다.
할머니도 안 계시고 그날의 동생들도 없지만 우리가 함께 했던 여러 번의 추석은 여전한 온도를 지닌 채 내 안에 담겨있다. 매년 추석이 다가오면 내 마음의 한켠에 고이 모셔둔 할머니와의 추석을 들여다보고 꺼내어 바라보게 된다. 엄마가 사오신 마트표 송편이 식탁에 놓여있다. 찍어낸 듯 한결같은 예쁜 송편의 가지런한 모습에서 할머니가 힘들게 익반죽으로 만들어 주셨던 투박한 송편이 떠올라 미소가 피어오른다.
"아가, 잘했다. 힘든데 송편을 왜 만든다냐. 돈 주고 사 먹어라, 앞으로도."
할머니라면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시겠지. 본인은 힘들어도 자식들 힘든 건 절대 못 보셨던 분이니까.
"네, 할머니 사 먹을게요."
나는 그녀의 말을 따를 것이다. 이것이 내가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전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