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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 에세이스트 J Aug 31. 2024

그깟 아이스크림 한 개

나의 첫 번째 여자 - 4

가을의 기운이 어느새 여름을 파고 들어왔다. 

햇살이 다시 가벼워지고, 거리의 나무들이 성숙한 빛으로 바뀔 채비를 한다. 숨을 못 쉬도록 무겁게 내리깔려 있던 공기도 그 무게를 거둬들였고, 이제 그늘에서는 제법 시원한 바람이 땀을 말려준다. 


여름에 시달렸던 그 강렬한 기억 때문인지 여전히 남아있는 여름의 기운 때문인지, 아직은 거리를 걷다 보면 자연스레 아이스커피 한잔을 사서 손에 쥐게 된다. 도처에 존재하는 크고 작은 커피전문점 덕분에 손쉽게 얼음 가득한 컵을 손에 쥐고 걷다 보면 그래도 더위는 견딜만한 존재가 된다. 이것이 나의 여름이었다. 


"할머니, 더운데 그렇게 걸어 다니면 더위 먹어요. 제발 물한병이라도 사 드세요."

"금방 집에 오는데 돈 아깝게 물에다 돈을 쓴다냐. 집에 와서 이렇게 찬물 한잔 마시면 땀이 싹 다 날라가는데."


참, 억척같이 사셨던 우리 할머니. 할머니가 보낸 칠십 번이 넘는 여름은 그녀처럼 질기고 드셌다. 그래도 그녀의 여름은 그녀를 넘어서 그녀를 꺾은 적이 한 번도 없었고, 할머니의 살아생전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장소도 그늘이라고는 한 점도 없는 한 여름의 밭이었다. 할머니는 여름 앞에서 늘 승자였다.


할머니가 우리 집에서 살던 시절, 할머니의 일과는 아침밥을 드시고 우리 집을 나와 지하철 한 정거장 거리에 있는 고모집에 가시는 걸로 시작됐었다. 당연히 무료로 탈 수 있는 지하철을 마다하고 운동해야 한다면서 굳이 걸어 다니셨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무작정 앞만 보고 걸으시는 그 속도가 얼마나 빨랐던지 옆에서 보고 있으면 거의 앞으로 넘어지실 것 같은 기세로 걸어 다니셨다. 할머니만의 이 독특한 걸음걸이로 인해 나는 먼발치에서도 할머니를 알아볼 수 있었고, 그때마다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들어도 자신이 가야 할 방향 이외에 다른 곳으로는 절대 눈길을 주지 않았던 할머니는 나를 알아보신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봄, 가을 같은 계절에는 할머니 말씀처럼 우리 집과 고모집이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어서 여차저차 걸어가기에 나쁜 조건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여름과 겨울이었다. 특히 여름에 고모집에서 우리 집에 오시는 날에는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기 일쑤였고, 오자마자 바로 냉장고로 달려가 찬물을 꺼내어 큰 컵 가득히 마시고 나서야 숨을 돌리시곤 했다. 자식들이 물한병 사 마실 돈을 안드리는 것도 아니건만 할머니는 절약이 평생 몸에 밴 사람답게 100 원한개 허투루 쓰는 법이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물한병 안 마시고 거의 탈수되기 직전의 모습으로 집에 오시는 할머니를 보던 나는 이해가 되면서도 되지 않았었다. 


어느 날 할머니와 마주 앉아 밥을 먹을 때였다. 그날도 고모집을 다녀오셨던 할머니가 지나가듯 한 마디를 던지셨다. 


"오다 보니까 길에서 애들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더라. 그게 오늘은 왜 그렇게 맛있어 보인다냐."


순간 밥이 삼켜지지가 않았다. 사실 할머니에게 물한병도 안 사 먹냐고 핀잔을 하려던 참이었다. 생전 뭘 드시고 싶다고 말한 적이 없던 할머니가 한 말이었기에 난 충격을 받았다. 


"할머니 돈 있잖아. 물한병이나 아이스크림 한 개나 가격은 비슷해. 그냥 사 드세요. 내가 돈 줄게."

"아가, 니가 돈이 어딨냐. 있으면 무조건 모아라. 아이스크림 한 개 홀랑 먹으면 없어질 텐디, 그거 먹겠다고 돈을 그렇게 쓰면 쓴다냐. 그냥 한 말이다."


그날부터였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사서 냉장고에 넣어두기 시작했다. 할머니도 드시고 부모님도 드시라고 한 번에 열개씩 사서 넣어두었다. 할머니는 아이스크림을 권할 때마다 애기가 피 같은 돈을 썼다고 한참을 뭐라고 하셨지만 나의 강권에 못 이겨 매번 맛있게 드셨고, 나는 그 모습이 너무 행복해서 절대 냉장고 안 아이스키크림의 잔여량 확인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할머니는 절대 자신의 손으로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는 일은 없었다. 그마저도 자식들 생각해서 드시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이 일을 지상명령으로 생각하며 난생처음 자발적 책임감으로 중무장한 손녀가 아니었던가. 나는 늘 집에 오기만 하면 아이스크림 개수를 세었고, 만일 할머니가 드시지 않은 날이면 할머니의 약점, 즉 돈낭비를 싫어하는 할머니를 공략하기 위해 이렇게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으면 맛이 변해서 곧 못 먹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내 돈이 낭비된다는 식의 말도 안 되는 억지 논리를 가지고 할머니가 기어이 드시게 만들었다. 


아직 남은 여름이 오는 가을에 매달려 미약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다. 그래서 나 역시 아직은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손에 쥐게 되는 날이 많다. 할머니가 돈이 아까워 못 사드시던 물한병, 아이스크림 한 개에 비하면 내가 사 먹는 커피는 지나친 사치다. 가끔은 할머니가 생각나 커피전문점을 지나치기도 한다. 그렇게 지나치는 날에는 유난히 할머니를 생각하고 할머니를 느낀다. 돈 아껴서 잘했다고 칭찬도 받고 싶다. 


할머니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은 추억에 젖은 채 과거에 머물기 위함이 아니다. 나는 그녀의 핏줄이고 유산이며 그녀의 삶 일부를 공유했던 사람, 그래서 그녀를 기록함은 결국 나를 기록함과 같다.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그 시간은 나를 가장 사랑했던 시간이기도 했다. 

그러니 내가 지금 하는 기록은 나에 대한 사랑의 회복을 위한 행위이다.

나를 사랑하는 일은 그녀를 사랑하는 일로 환원된다. 우리는 이렇게 순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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