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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 에세이스트 J Sep 21. 2020

껍질은 집어 던져 버려!

영화 <뮤리엘의 웨딩 Muriel's Wedding>(1994)

나의 삶에서 가장 나다울 때는 언제인가. 인간의 행복은 어떤 합일점에서 이루어지는가. 누군가의 딸이고 친구인 나는 주변에 누군가와 함께 하는 순간에도 "나" 임을 지닌 채 진정 자유로울 수 있을까. 나를 나로 존재하지 못하도록 옭아매는 사슬은 과연 무엇인가. 


영화 뮤리엘의 웨딩이라는 독특한 호주영화는 나에게 이런 문제들을 떠올리게 하고 고민하게 만들었다. 일상에 짓눌려 살면서 그 어느 때보다 나를 찾고 싶은 요즘. 현재에 부재하는 것 같은 나를 찾기 위해서는 현재를 탈피하는 것에서 그 여정을 시작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내가 속하고 머무르는 "현재"라는 나의 일상을 떠나면 사회속에서 살아나갈 수 없을 거라는 관습적 두려움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EGO 혹은 SELF를 찾지 못한 공허함을 견디는 것으로 살아있음을 감각한다. 


나의 현재가 그냥 머물러도 될 만큼은 되는 건가? 나의 현재를 벗어나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 걸까? 내가 나를 느끼지 못하며 관행적인 24시간을 보내는 그 반복적인 패턴을 두고 "삶"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인가? 한번 저질러 보는 것은 어떨까? 지금보다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여기, 나보다 훨씬 용감하고 무모한 여자가 있었다. 비록 잘못된 행동의 결과로 비롯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해도, 그 또한 어떠한가라는 울림을 주었던 호주의 한 여자. 그 여자의 탈피과정을 들여다보며, 영화에 나오는 대사(친구들이 뮤리엘을 따돌림하기위해 했던 대사이지만) "You'll still be you"가 얼마나 멋진 찬사였는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감옥 아닌 감옥에 갇혀있는 듯한 한 여자가 있다. 비호감의 외모에 주변 사람들과의 소통의 방식 역시 남달라서 친구에게도 가족에게도 이웃에게도 없느니만 못한 여자. 존재로서는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무용지물인 여자. 삶의 숨 막힘에 질식하려는 순간 그 여자는 자기 방에 틀어박혀 스스로 세상과의 단절을 꾀한다. 바로 그 유명한 ABBA의 Dancing Queen으로. ‘You are the dancing queen, young and sweet only seventeen.’ 


언제쯤 여자는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무대 위의 퀸이 될 수 있을까. 그런 날은 올까? 어쩌면 이 장면은 여자의 일탈의 시작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즉, 퀸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과 열망, 그리고 현실을 회피하여 뛰어넘고자 하는 허상이 여자의 일상을 비틀고 일탈로의 싹을 움트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자의 일탈의 시작이 갖는 이런 특성은 앞으로 펼쳐질 여자의 진정한 자아 찾기를 찾는 행로에 결정적인 걸림돌이자 극적인 전환점이 되어 버린다.

멍하니 아바의 댄싱퀸을 듣는 뮤리엘. 자신의 가치를 찾지 못한 그녀의 공허함이 드러난다. 

 

무대 위의 빛나는 존재, 강렬한 한줄기의 스포트라이트를 온통 받는 존재가 되는 순간만이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든다고 믿고 있는 이러한 환상은, 결국 자신의 현실을 축소하고 자신이 있어야 할 공간에 대한 올바른 의미부여에 실패를 가져온다. 


뮤리엘의 경우, 아버지의 백지수표를 가지고 섬으로 훌쩍 떠난다거나,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와 함께 새로운 도시에서 새로운 정체성으로 상징되는 마리엘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게 되는 과정이 이것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새로움은 그녀를 외적으로 변화시키고 어떤 행동을 하든 not-Muriel 코드로 일관돼야 올바르고 정당하다는 새로운 동기를 강박적으로 부여하며, 결혼에 대한 무지막지한 환상을 양산해 결국 자신을 스스로 그린카드로 전락시켜 도구화해 버린다. 그것도 기꺼이.

드디어 자신의 가치를 확인한 뮤리엘. 그러나 그것은 타인의 시선에 의존한 허상이었을 뿐.

 

새로운 환경에 새로운 정체성이 제대로 안착이 되어야 행복의 합일점을 이루겠지만 뮤리엘은 그렇지 못한다. 


왜일까. 새로이 만들어진 껍질 안에는 여전히 뮤리엘이 존재할 뿐이며, 그녀가 한사코 따르려고 했던 not-Muriel코드는 역설적으로 뮤리엘로서의 정체성을 떠올려야만 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뮤리엘이 아니라고 외치기 위해 뮤리엘을 끝없이 언급해야 하는 역설. 이러한 역설의 악순환은 깨닫지 못하는 무지의 기간 동안 내내 유효할 수밖에 없다.




뮤리엘의 악순환적인 고리를 깨뜨린 것은 비참하게도 외부환경에서 기인한다. 평생 기만당하고 희생당하던 엄마의 죽음은 어쩌면 뮤리엘이 가게 될 몇 안 되는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엄마의 죽음은 뮤리엘을 강제적으로 껍질에서 나오게 한다. 허상과 기만이라는 껍질, 세상의 눈높이에 본인을 맞추어 그들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가장 세속적인 욕망이라는 껍질. 이 껍질에서 뮤리엘은 비로소 자의적으로 탈출하게 된다.


 자신을 묶어두었던 고향마을을 홀가분하게 떠나며 그녀가 마주하게 될 여정은 지난번 여정과는 사뭇 다를 것이다. 이제는 진정한 뮤리엘로서 세상과 맞서게 될 것이다. 적어도 세상의 시선과 기준에 자신을 맞추고 그들이 세워준 무대에 올라가 허상의 퀸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 여정에서 그녀는 자신의 무대에서 스스로 퀸이 되고자 떠난다. 그리고 그 여정을 함께 하는 것은 옆에 있는 친구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껍질을 탈피하여 그녀 자신으로 자유롭게 비상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얼마나 자신의 진정한 내면과 마주하고 있는가. 내가 행복하지 못하고 내가 내 삶에 만족하지 못하면서 안일하고 쉽게 놓아버리고 포기해 버린 것들 중에는 어쩌면 나 자신의 진짜 모습이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이마저 느끼지 못한다면 어쩌면 행복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런 사람들의 무감함은 치열한 삶과의 전쟁을 시작도 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오히려 고민 없이 그들을 살아가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진정한 나에게로의 여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고민해보아야 할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지극히 클래식하며 소박한 ‘존재’에 대한 의문은 수천 년 동안 그래 왔던 것처럼 그저 전개되고 있는 상황이며, 이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하는 인류의 열망은 그것을 반영하는 현상일 뿐이다. 질문은 전 인류적이나 그 답은 지극히 개인적 일 것이며, 동시에 인류 모두에게 통할 보편성을 수반할 것이다.


머리 스타일을 바꾸고, 체형을 변화시키고, 얼굴을 바꾸고 이름을 바꾸어서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결국 새로운 껍질이다. 이런 허상뿐인 껍질을 끊임없이 구축하고자 하는 행위는 그럼에도 일시적이나마 새로움에 대한 본능적 갈망을 해소해 만족을 주거나, 좌절을 막기위한 망각을 일으켜 줌으로써, 일종의 인류의 생존전략으로 자리매김 한것 같다. 


나를 마주함은 결국 미노스의 미궁과 같을 수도 혹은 가로수가 쫙 곧게 뻗은 투스카니의 어느 시골 길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길을 선택하든 결국 나는 나를 만나야 한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나의 심장이 어떤 일에, 어떤 사람에게 쿵쾅거리며 요동치는 지 알아야 한다. 이것은 내가 나로서 존재하고 사유하는 기간이 제한된 것이기 때문에 더욱 전력을 다해 덤벼들어야 하는 가장 절박한 행위여야 한다.

 

 마음이 거부하는 것이라면 과감히 내던지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가보아야 하지 않을까. 아무것도 해보지 않고서는 나는 나를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움직임이 있어야 상황도 바뀌고 환경도 바뀌는 것이다. 


가보고 싶은 길은 모두 가봐야 하며, 그 길이 멀고 험해 보일수록 발을 내딛어봐야 자신의 한계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사랑도 마음껏 해보고, 목숨 걸고 지켜야 할 것이 생긴다면 목숨이 수십 개는 되는 양 일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뛰어들어 봐야 하지 않을까. 


뛰어야 하는 걸 알면서도 동시에 뛰고 난 후의 힘듬이 먼저 떠오른다면, 어쩌면 뛰는 것은 나에게 맞지 않는 선택일 수 있다. 마음이 거부하는 것이라면 과감히 내던지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가보아야 하지 않을까. 아무것도 해보지 않는다면 내가 나를 만나는 그 길은 절대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움직임이 있어야 상황도 바뀌고 환경도 바뀌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제인 오스틴이나 에밀리 디킨슨을 동정한다. 그녀들의 문학세계가 치밀한 심리묘사나 배경에 대한 탁월한 기술, 삶에 대한 끝없는 사유와 성찰을 보여주며 문학으로서의 위대함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녀들이 이루어낸 성취는 어쩌면 한 곳에만 머물렀던 그녀들의 삶, 껍질을 과감히 벗어던질 수 없었던 족쇄같던 삶이 잉태한 필연적인 결과물에 머무른 것이라고 보여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방에서 끝없이 자신의 머릿속만을 들여다보며 그것을 낱낱이 단어로 옮기다 건강한 영혼을 증발시켜버렸던 버지니아 역시 동정하고 싶다. 이들보다는 마음껏 자신의 삶을 발산하며 삶을 찬미할 수 있었던 헤밍웨이, 사강, 케루악을 동경한다. 그들의 작품에 대한 업적이나 평가에 앞서, 그들은 자기 자신 그 자체를 고스란히 문학에 옮길 수 있었던 다채로왔던 삶들을 살아낸 사람, 즉 주어진 혹은 허용된 생애 동안 ‘자신’에게 가장 충실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열정적으로 자신을 불태웠던 내 앞의 모든 선배들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노라 애프런, 움베르토 에코, 줄리안 반스, 필립 로스… 자신을 찾아서 재능으로 자신의 내면을 활짝 펼쳐 보인 이 사람들이 어쩌면 내 여정의 끝에서 내가 만나기를 염원하는 나일 것이다.

 


행복하니? 


이 단순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모든 걸 내려놓고 여행작가가 되었다던 김영주 작가. 그녀의 그 결심에 크게 마음이 갔던 나였다. 행복하니? 이 단순한 질문에 다수의 우리는 어렵게 답하고 쉽사리 회의의 늪에 빠진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 아직은 우리의 여정이 시작도 되지 않았음을, 어쩌면 여정을 떠날 용기가 끓어오르지 못했음을 역설적으로 깨닫는다. 


마음껏 고향과의 작별을 고하는 뮤리엘의 모습에서 그녀의 자아 찾기는 이제 시작되었음을 알게 된다. “내가 나에게 머물지 않았음”을 느끼는 그 순간이 바로 여정의 시작임을 이제는 안다. 타인이 세워둔 무대에 냉큼 올라가 "그들의 퀸"이 된 척하는 우리는 비겁하고 비참하다. 나의 무대를 만들기 위한 여정에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한다. 진정한 dancing queen은 그런 무대만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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