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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 에세이스트 J Jan 31. 2024

나, 괜찮다고 말해줘요

영화 <레슬리에게, 2022>

한 여자가 초라한 행색으로 길거리에 쭈그리고 앉아 다 타버린 담배꽁초를 입에 문다.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것 같은 얼굴, 때가 낄 때로 낀 기름진 머리. 그녀는 지금 왜 이곳에서 이렇게 앉아있는 걸까? 어떤 삶이 그녀를 이렇게 만든 걸까? 그녀가 이 삶을 벗어날 수는 있는 걸까?



영화 <레슬리에게>는 나락에 떨어진 한 여인의 어리석음과 회한, 분투를 통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어디까지 어리석을 수 있는지, 자신이 만든 굴레에서 빠져나오는 데에는 무엇이 필요한지. 더 나아가 우리를 다시 일어서게 만드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이 영화의 힘은 우리에게 던지는 강력하고 진정어린 질문에 있다.  


또한 레슬리 역을 맡은 안드레아 라이즈보로는 마치 영화 <더 웨일>에서의 브랜든 프레이저처럼  믿을 수 없는 연기로 영화를 이끌어 나간다. 명불허전 엘리슨 제니의 색다른 모습도 이 영화의 감상 포인트다.


      




익숙함이라는 중독  


인간은 새로움보다는 익숙함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존재다. 익숙한 핸드폰, 익숙한 관계, 익숙한 장소. 우리는 익숙한 것들로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어 간다. 때때로 새로움에 대한 충동을 느끼고 세상 밖으로 한 두 걸음 내디뎌 보기도 하지만 이내 있던 자리로 되돌아 와서 안도한다. 대부분의 경우 익숙함은 우리를 보호하고 삶의 평형상태를 유지시켜주는 안전장치가 되어주지만, 어떤 익숙함은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다. 아니, 우리가 놓고 싶어 하지 않는다. 



레슬리는 늪에 빠져있다. 그러나 늪으로 들어가라고 말한 이는 아무도 없다. 자신이 늪에 빠져있다는 인식도 행동을 바꾸지 못한다. 아들 친구의 돈을 훔치고, 낯선 남자를 유혹하고, 자신을 돕고자 하는 타인의 선의를 배신하면서까지 그녀는 늪을 선택한다.


질척거리며 비루한 늪은 자신이 만든 새로운 익숙함이다. 6년 만에 만난 다 커버린 아들과 자신 때문에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새삼 미안하다 해도 이 새로운 익숙함을 양보할 마음은 추호도 없어 보인다. 그녀는 익숙함에 중독되어 버린 것이다. 


존재의 이유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순간 이미 존재해 있는 상태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존재의 문제는 ‘왜’ 존재해야 하는가, ‘어떻게’ 존재를 이어나가야 하는 가가 될 수 있다. 이처럼 존재에 대한 우리의 질문은 지극히 개인적 차원에서 답을 구하게 한다. 그러나 때로 이 질문의 답에 대한 영감은 외부에서 기인하기도 한다. 바닥까지 떨어져도 절대 놓지 못하는 그 무엇, 혹은 그 누군가가 내 존재에 개연성을 부여하고 필연성을 합리화한다. 




그렇다면 레슬리는 왜 존재하는가? 니체가 말하는 비 본래적 존재 같던 그녀를 끈질기게 존재하게 만들었던 유인원은 무엇이었을까? 그 답은 그녀의 낡고 헤진 가방 안에 있었다. 


그녀가 가진 전 재산이었던 캐리어 안에는 약간의 잡동사니와 함께 아들의 사진이 있었다. 6년 전 자신이 버리고 온 아들의 존재는 그녀의 삶이 허상이 아님을, 그가 실재하듯 자신도 실재하고 있음을 증명해주는 단 하나의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존재하지 않을 이유를 막아서는 이 단 하나의 중대한 이유가 그녀를 존재하게 했다. 


일어서는 일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주인공 리즈는 이탈리아의 유적지를 보며 ‘폐허는 선물이다, 폐허는 변화로 가는 길이다’라는 것을 알게 된다. 리즈는 그곳에서 2,000 여년의 세월을 품은 채 잔재만 남아있는 폐허를 보며 그녀의 무너져버린 삶을 떠올린다. 애써 쌓아올렸지만 이제는 흔적 없이 사라진 그녀의 삶을 되돌아보며 폐허는 새로운 것을 세울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임을 깨닫는 것이다. 



절대 빠져 나올 수 없을 것 같던 늪, 몇 번이고 다시 되돌아가고 싶은 그 늪에서 레슬리는 가까스로 빠져 나온다. 그러나 아기의 첫 걸음이 한 번에 성공할 수 없듯, 익숙함을 끊어내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온 레슬리의 도전역시 쉽지 않았다. 


결국 굴복하고 익숙한 늪으로 돌아가나 싶은 그때 자신을 여전히 나락에 빠진 폐허로 보는 타인의 시선을 맞닥뜨리게 된다. 익숙한 시선, 익숙한 장면. 레슬리는 그 순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지금 굴복하면 영원히 익숙한 폐허로 존재해야 함을 말이다. 


이제 레슬리는 폐허로 남고 싶지 않다. 그렇게 레슬리는 폐허에서 일어선다. 폐허로써의 레슬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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