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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 에세이스트 J Mar 05. 2024

창작된 진실의 낭자한 비극

영화 <추락의 해부, Anatomy of a Fall, 2023>

하얀 눈밭에 한 남자가 죽어있다. 머리를 둔기에 맞고 피를 흘린 채 죽어있는 이 남자는 어쩌다 이 꼴로 죽어있는 것일까? 누가 그의 죽음에 관여된 걸까? 앞을 보지 못하는 11살 난 아들인가 아니면 그와 몇 년째 갈등을 빚고 있는 아내인가? 둘 다 아니라면 그가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일까? 어느 날 발생한 느닷없는 그의 죽음으로 시작되는 영화 <추락의 해부>는 관객을 시작부터 죽음의 원인에 몰입하게 만들며 배심원의 자리에 앉혀 놓는다. 하나의 죽음, 이 비극적 사건을 통해 감독이 정말로 말하려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것을 좀 더 들여다본다. 



쥐스틴 트리에 감독의 2023년 작 <추락의 해부>는 일견 배우자의 죽음을 둘러싼 단순한 법정  공방극으로 비춰질 수 있으나, 사실 영화는 뚜렷한 하나의 진실을 제시하기보다는 혼란스러운 파편적 진실의 더미에 관객을 던져놓기 때문에, 제대로 된 증거 없이 이론과 주장, 의견만 난무한 갖가지 해석들 속에서 관객이 스스로 진실을 발견해 나가야 하는 영화다. 게다가 결국 죽음의 진실을 보여주지 않는 결말에 이르게 되면 관객은 그제서야 감독의 의도가 단순히 사건의 규명이 아닌 무언가 다른 곳에 있었음을 생각하게 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세 번째 여성 감독의 작품이자 세자르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고, 제96회 아카데미에서 5개 부문에 올라 일찍부터 관심 작으로 회자되고 있는 영화 <추락의 해부>에서 우리는 어떤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을까?

  

사자(死者)가 열어놓은 지옥에 들어서다


죽은 사무엘과 그의 아내 산드라, 그리고 그들의 아들 다니엘은 프랑스의 한 산악지역에서 외부와의 교류가 거의 없는 채 살고 있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이들 가족의 실제는 어땠을까?


 사무엘은 아들의 교통사고에 대한 극도의 죄책감과 책임감, 가사를 오롯이 홀로 떠맡으며 박탈되어버린 자신의 창작시간과 이로 인한 커리어의 희생, 산드라의 극단적 이기적 행태와 배신에 뼛속까지 쌓인 피해의식으로 이미 한참 전에 고통의 임계점을 넘어선 상태였다. 


산드라 역시 아들의 사고에 대한 책임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끝도 없는 사무엘의 우울감과 자신의 글을 약탈해갔다는 사무엘의 비난, 자부심은 넘치나 재능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책임전가, 사고이후 끝나버린 성생활, 게다가 행복했던 런던을 떠나 언어적 불편을 겪어야 하는 프랑스에서의 적막한 삶에 숨막혀 하고 있었다. 예쁘기만 해 보이는 산가의 문 안쪽, 그곳은 사실 아무도 모르는 부부만의 지옥이었던 것이다. 



사르트르가 말했던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을 글자 그대로 껴안고 살던 이들 부부의 불편한 현실은 결국 사무엘의 죽음이라는 가장 극적인 형태로 만천하에 폭로되었다. 그리고 폭로된 지옥은 남아있는 산 자, 즉 다니엘에게 또 다른 지옥이 되고 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지옥에 있었으나 지옥의 실재를 몰랐던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어느 한 순간에 곧바로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다니엘처럼 어느  한순간의 경험으로 어른이 되기를 강요 받는 아이들도 있다. 원래 아이는 태어나면서 부모가 만들어준 보호막 안에서 선함과 아름다움을 양분삼아 자라난다. 보호막안의 아이는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당연히 알지 못하며, 부모 역시 아이의 아이 다움을 유지해주기 위해 그를 철저하게 외부로부터 보호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보호막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 의해 지켜지는 만큼 손상 역시 그들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언제든 보호자들의 사정으로 깨질 수밖에 없는 모순적 운명에 처해있다. 다니엘은 바로 그러한 운명에 놓여있었다. 다니엘 자신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시력을 잃었듯 그는 또 한 번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참담한 현실에 노출되고 만다. 아빠의 갑작스런 죽음과 알지 못했던 부모의 진실. 이렇게 다니엘은 떠밀려 어른의 세계로 끌려 나와 부모의 지옥에 던져지게 되는 것이다. 


계산된 캐릭터로 프레임을 전환하다


영화 <추락의 해부>가 지닌 각본으로서의 힘은 사망의 원인에 대한 모호성에 기반한다. 사무엘의 사망에 대한 직접적 원인이나 증거대신 그럴듯한 정황과 납득할만한 주장만을 제시한 감독의 묘수 덕분에, 영화의 주요 무대가 되는 재판을 바라보는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연스럽게 사건의 본질을 잊고 부수적인 것에 시선을 두게 된다. 그렇게 부수적인 것들이 본질을 재끼고 전면에 위치하면서 결국 재판은 사망사건에 대한 이성적 해결의 장이 되기보다는 배우자인 산드라에 대한 윤리적 심판의 장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산드라는 어떠한 캐릭터인가? 프랑스에서 굳이 영어를 고집하고, 남편이 고심한 작품에서 핵심 아이디어를 가져다 자신의 작품에 이용하고, 남편과 성관계가 멈추자 다른 여성들과 여러 차례 관계를 갖고, 집안일을 나누는 일에 대해 논의하자는 남편의 절규를 비합리적이라고 일축하는 인물, 즉 철저하게 이기적이고 자기본위 적인 비호감적 특성으로 무장된 인물이다. 산드라는 왜 이렇게까지 비호감의 인물로 설정된 것일까? 감독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배우자간의 재판이나 배우자가 관련된 재판인 경우, 양측이 존재해야만 분명한 판결이 가능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 영화에 등장하는 재판의 경우에는 한쪽의 목소리가 배제된 채 남은 쪽의 목소리로만 판결을 해야 했고, 심지어 정황이외의 증거조차 전혀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애당초 재판이 무의미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렇게 본다면 감독이 재판이라는 구조를 영화의 중심에 둔 것은 실은 다른 의도, 다른 목적이 있어서는 아니었을까? 


메시지를 공격하지 못할 때 우리는 흔히 메신저를 공격한다고 한다. 이렇게 메신저를 공격하다 보면 처음에 시작된 메시지에 관한 공방은 사라지고 대중의 관심은 메신저자체에 쏠린다. 진실의 실종이자 이른바 프레임의 전환인 것이다. 같은 이치로 산드라라는 캐릭터의 철저한 비호감성은 관객에게 그녀가 용의자가 되기에 충분한 것 같다는 눈가림막 용 근거가 되어 사건의 모든 정황적 중심에 그녀를 서게 한다. 어쩌면 감독은 영화에 재판을 등장시켜 우리가 얼마나 진실의 일부를 이루는 그럴듯한 사실만으로도 쉽게 흔들리고 호도될 수 있는지를 말해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결여된 서사를 채워 지옥의 문을 닫다


소설가인 산드라는 항상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자신의 작품을 창작해왔다. 일부의 사실을 개연성으로 이어붙여 하나의 서사로 완성한 그녀의 작품은 그렇기 때문에 팩트와 픽션의 중간에 어중간하게 위치한다. 하지만 독자는 소설을 읽으며 팩트가 무엇이고 픽션은 어디까지인가의 여부를 따지지는 않으며 심지어 그것은 문학에서 하등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껏 작가로서의 그녀는 자신의 서사에 근거를 들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법정에 선 지금, 그녀에게는 그녀의 서사, 즉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그 서사에 힘이 되어줄 근거가 필요해졌다. 소설과 달리 현실에서는 증명 가능한 확실한 개연성만이 서사에 진정성을 불어 넣어주기 때문이었다. 



재판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산드라는 궁지로 몰린다. 특히 사무엘의 사망 전날 사무엘이 녹음해 둔 둘의 난폭한 대화와 싸움 파일이 공개되면서 산드라는 더욱 추궁을 받는다. 소설에서 보여주었던 증명이 필요 없던 그녀의 능수능란한 서사는 현실에서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이대로 그녀는 파멸하는 것인가? 무엇이 그녀의 서사에 개연성을 부여해줄 수 있을 것인가?


최초로 아빠의 시신을 발견한 사람은 앞을 보지 못하는 11살의 다니엘이었다. 자신을 홈 스쿨링까지 하며 돌 봐주던 아빠의 죽음에 한없이 슬퍼하던 다니엘은 엄마의 재판이 시작되자 굳이 참석하여 부모의 실상을 알고자 한다. 부부의 지옥은 그렇게 다니엘의 지옥이 되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둘러싸인 채 그 자리에 앉아있던 다니엘은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부모 중 누구의 편을 들어도 바뀌지 않을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왜 다니엘은 엄마를 지지하는 쪽으로 마음을 먹게 되었을까?



시력을 거의 잃고서도 다니엘은 여느 아이들과 마찬가지의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만큼 다니엘은 자신의 고통 속에서도 일상을 살아가는 힘을 가진 아이였다. 게다가 그는 부모의 참상을 알게 되었으면서도 그것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받아들이며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였다. 


이런 관점에서 다니엘의 결정을 재고해본다면 아빠의 사망이후 지옥이 되어버린 일상을 복원하는 유일한 방법은 엄마의 서사에 개연성을 부여하여 그녀를 되찾는 것이 아니었을까? 다니엘은 분명 재판 과정 속에서 알게 된 엄마의 부족한 서사를 보충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자신 뿐임을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감독은 어쩌면 다니엘의 선택을 통해 우리가 시작하지 않은 지옥이더라도 그것을 끝낼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자신 뿐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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