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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 에세이스트 J May 03. 2024

익명의 개체에서 특정한 실존으로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 2023>

멍한 얼굴의 그녀가 식탁에 앉아있다. 가구라고는 거의 없는 황량한 집안. 식탁을 차지하고 앉은 라디오에서 쏟아져 나오는 전쟁소식에 라디오를 꺼버린다. 정적만이 가득한 방. 이것이 그녀의 삶이다. 말없이 술을 연거푸 마시며 줄담배를 피는 그. 주변의 소음도 동료의 시시한 농담도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 하다. 그의 일상에는 술뿐이다. 이것이 그의 삶이다. 



핀란드의 거장,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이 2017년에 선언했던 은퇴를 번복하고 6년 만에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를 발표했다. 그는 이 영화에서도 그동안 다루어왔던 소외된 무산자계층의 삶을 조명한다. 그러나 이번 영화에서 그는 한결같은 관심사와 주제를 표현함에 있어, 자신의 장기인 미니멀한 연출과 블랙 코미디적 요소를 좀 더 대중 친화적으로 녹여내면서 그간 다소 컬트적 한계를 지녔던 영화적 지평을 넓혔다는 평을 받게 되었다.  


1. 무의미가 유의미한 무명의 개체들


무산자들의 삶에 흐르는 시간은 마치 한 시점에 고여있는 듯하다. 외부의 발전과 동떨어진 채 그들만의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그들. 그래서 빈티지한 화면 속에 담긴 주인공들의 삶은 시대와 장소를 특정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그들의 삶이 보이는 비루함으로 인해 그들이 속한 계급만이 오롯이 특정되어 명확하게 떠오른다. 가진 것 없고 머물 곳 없는 자들. 표정 없는 갈색 얼굴들의 숲 같은 그들의 일상은 표정 없는 그들의 얼굴을 닮아있다. 그들은 왜 존재하는가? 이들의 존재란 것이 한줌의 의미라도 있는 현상인가? 


길거리에 떨어져 뒤덮여 있는 낙엽을 보며 우리는 쓸모를 논하지 않는다. 또한 떨어진 잎들 하나하나를 구분하여 그들의 이름을 구분하지도 않는다. 떨어진 잎은 그 직후 이름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낙엽은 그저 집단으로 존재하며 군락적 형태로 거리를 뒹군다.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도, 바람에 휩쓸려가도, 떨어지는 비에 온몸이 젖어 들어가도 저항한번 하지 않고 순응한다. 이러한 낙엽의 속성에서 영화의 주인공인 안사와 홀라파가 자연스레 연상된다. 



그렇다. 이들은 낙엽이다. 개인으로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으며, 이름이 있으나 호칭되어 입에 오르지 않는다. 언제든 사회에서 내침을 당하고, 당하면 당하는 대로 생존의 방식을 찾는, 이들은 바로 낙엽인 것이다.


2. 전쟁의 일상화      


마틴 맥도나 감독의 2022년 작인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에서 우리는 인간을 해치고 갈라놓는 것이 비단 물리적 전쟁뿐 아니라 내면의 전쟁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 끊임없이 전파를 타고 두 주인공에게 전달되는 전쟁은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감독은 왜 주인공들과 무관할 것만 같은 전쟁의 소식을 끊임없이 주인공들의 일상에 풀어놓은 걸까?

대부분의 우리가 당연한 듯 누리는 의식주가 누군가에게는 치열하게 쟁취해야만 하는  노동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다. 매일을 필수적인 의식주의 확보를 위한 투쟁으로 견디는 사람들에게 어쩌면 삶의 장은 그 자체만으로도 전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상시적으로 외부의 압박을 받는 주인공들은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다양한 일터에서 이러저러한 이유로 손쉽게 해고를 당한 채, 사회의 외곽으로 밀려난다. 물리적 갈등이나 다툼이 없다한들 자신들을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시스템 밖에 머무는 이들에게 삶은 그저 저항과 생존의 현장일 뿐이다.      


폭탄이 터지고 탱크가 돌진하는 먼 나라의 전쟁 상황을 이들은 이미 삶에서 충분히 겪고 있다. 폭탄이 터지듯 해고의 소식이 날아들고, 탱크가 짓밟듯 일상을 짓밟히는 나약한 이들에게 전쟁은 이미 추상적 성격을 넘어선 실제적 상황이다. 그러니 라디오만 켜면 기다렸다는 듯이 흘러나와 이들의 일상에 섞여 들어가는 전쟁의 뉴스를 통해 감독이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이들이 겪는 일상적 전쟁의 참상은 아니었을까. 



3. 희망의 불씨가 되어준 최소한의 낭만     


불을 피우기 위해서는 아주 작더라도 최초의 불씨가 있어야 한다.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방향을 잡고 나아가려면 깨알만한 빛이라도 떠있어야 한다. 이처럼 무언가 일어나려면 아주 작고 미미하더라도 시작의 빌미가 되어줄만한 여지가 존재해야 한다. 이것이 시작을 위한 최소한의 전제조건이다. 

마이클 모리스 감독의 2022년 작인 영화<레슬리에게>에는 술로 인해 인생의 바닥까지 곤두박질한 레슬리라는 여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절망과 자기파멸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던 그녀가 결국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아들이라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슬리에게 아들은 새로운 시작의 여지가 되어주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 각자 고립된 채 자기만의 전쟁 같은 삶을 이어가던 우리의 주인공들이 마침내 한 지점에서 만나 따뜻한 교류를 시작할 수 있었던 여지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그들의 삶 어디에서 이 여지의 단서를 찾아볼 수 있을까?        


사람과의 교류에 흥미가 없고 오로지 술을 마시는 것으로 삶을 살아가던 자칭 상남자인 홀라파는 술에 취하지 않은 시간에는 뜻밖에 만화책과 소설을 읽는다. 그의 무뚝뚝한 이미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엉뚱한 만화와 책을 재미있어 하는 그의 모습이 그의 여지에 대한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삶이 온통 메말라 버리지 않도록 한 켠에 허구와 상상의 세계를 품고 있으니 말이다.      


또한 한적한 교외의 작은 집에서 고독하게 살아가던 안사는 저녁거리가 없어 밥을 굶고 있는 상황에서도 음악을 듣는다. 없는 살림에도 홀라파를 저녁식사에 초대하고는 애피타이저용 스파클링 샴페인을 구매한다. 버려진 개를 자신의 집으로 들여와 돌본다. 삶의 실제적 층위를 뛰어넘어 원하는 층위에서 존재하려는 노력. 안사의 여지에 대한 단서는 아마도 이것이 될 것이다.      


이제 여지를 가진 둘에게는 자신처럼 여지를 가진 누군가를 발견하고 알아봐주는 일만이 남아있었다. 이들의 여지는 수많은 갈색의 낙엽들 속에서 희미하게 본래의 색을 발현시켜주는 동력이 되어 마침내 두 사람을 마주하게 한다. 이렇게 그들의 여지는 과거를 밀어내고 현재를 창출하며 미래를 향한 불씨가 되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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