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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 에세이스트 J Jun 02. 2024

이제, 별이 되어도 돼

영화 <올 오브 어스 스트레인저스(2023)>

또 하루가 시작된다. 저절로 눈이 떠져 바라본 일출의 번짐. 경이롭게 자리를 넓혀가는 태양 빛이 점차 도시를 덮어가고 있지만 그걸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어떠한 표정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홀로 바라보았을 숱하게 반복되어왔던 일상적 마법의 한 순간이며, 어차피 그 마법이 그를 바꿔놓을 일이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게 마법은 루틴일 뿐이다.



영화 <올 오브 어스 스트레인저스, All of Us Strangers (2023)>는 <Weekend>, <45 Years>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영국 감독 앤드류 헤이그(Andrew Haigh)가 일본 소설가인 타이치 야마다의 ‘Strangers(1987)’을 원작으로 하여 만든 최신작이다. 소통과 만남, 과거와 현재의 반복을 통해 관계의 진정한 의미와 한계에 대한 질문을 던져왔던 감독은 이번 영화 <올 오브 어스 스트레인저스>에서도 이러한 자신의 특기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소름끼치도록 아름답게 상처입은 자들의 고독과 치유의 과정을 몽환적으로 그려냈다.




1. 치명적 상처는 정착을 앗아간다


어린 시절부터 아담은 남들과 달랐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었기에 그는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있었고 심지어 부모에게도 그러한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언젠가는 부모와 세상에게 떳떳하게 자신을 인정받고 싶어 했으나 한 번의 사고로 그는 자신을 인정해주고 수용해 줄 부모를 영원히 잃고 말았다. 세월이 흘러 그때의 부모보다 나이가 많아진 현재에도 아담의 상처는 그를 여전히 소년 상태로 머물게 한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상처와 함께 현재에 머무나 정착하지 못하고 세상의 거죽에서 떠돈다. 



우리의 시련과 상처, 그로인한 고통은 여러 층위의 상실에서 비롯된다.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떠나 보내야만 하는 젊음과의 이별, 타이밍을 놓쳐버린 고백의 순간까지 상실이라 부를 수 있는 사건은 실은 우리의 일상에 상수가 되어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상실만 놓고 본다면 우리는 도저히 삶을 지속해 나갈 수 없을 지경이지만 우리 대부분은 여기 이렇게 버젓이 존재한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그럼에도 우리가 삶을 지속해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은 우선적으로는 상실의 성격과 파장의 크기에 달려있겠지만 무엇보다 대부분의 우리에게 삶이 가능한 것은 상실을 만회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가 찾아오기 때문일 것이다. 떠나버린 이를 대신할 누군가 혹은 무언가, 사라진 젊음의 자리를 채워주는 안정감과 지혜, 나를 인정해주지 않던 누군가의 자리에서 나를 위로하는 따뜻한 눈길. 우리는 이런 두 번째 기회를 통해 상실로 인한 상처를 치유 받고 앞으로 나아갈 새로운 에너지를 부여 받기에 삶의 길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이러한 두 번째 기회를 영영 부여 받지 못한다면 어떨까? 그런데도 삶을 ‘제대로’ 살아낼 수 있을까? 이것이 영화의 주인공 아담에게 주어진 현실이었다. 



80년대에 자신이 게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소년 아담은 이것을 죄악시하는 당시의 사회적 풍조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모두에게서 스스로 소외된 삶을 살지만, 부모에게서만은 인정받고 싶어 했다. 그러나 부모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아담에게 진정한 자신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를 영구히 박탈했으며 이로 인해 아담은 그 이후 자신의 본질을 마음껏 내보이며 사랑하고 사랑받는 관계를 맺을 수 없게 된다. 


그렇기에 그가 살고 있는 거의 텅 비어 있는 것 같은 고층 아파트는 이런 그의 관계를 상징하는 장소가 된다. 다른 모든 칸에 사람이 살더라도 나와의 소통이 없다면 비어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상처로 응어리가 맺힌 아담은 이처럼 머무나 머물지 못하고 살아있으나 살아있지 않은 상태로 마치 영혼처럼 떠도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니 이런 아담에게 해리가 찾아온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하나의 상처가 또 다른 상처를 끌어당긴 것이니 말이다. 


2. 답을 듣고자 떠도는 자들


어느 날 내가 사고로 죽었다. 이제 나는 영혼이 되어 내가 죽었음을 안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세상에 머문다. 왜? 내가 한순간에 죽었는지, 고통 받다 죽었는지 알고 싶기 때문에, 또한 내가 남겨두고 온 내 자식이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하기 때문에 나는 갈수가 없다. 이것이 아담의 부모가 가진 질문이었고 그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할 때까지는 빛의 세상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반드시 답을 알아야만 하는 질문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를 생각해본다. 이러한 질문에는 스스로에게 던져진 자기 성찰적 질문과 답을 해주어야 하는 상대가 있는 질문이 있을 것이다. 자기 성찰적 질문에 대한 답은 그 과정이 얼마나 지난한들 자신이 답을 알아내거나 만들면 되겠지만, 상대가 있는 질문이라면 반드시 상대의 참여가 필요하다. 그래서 상대가 있는 질문은 어렵고 괴로우며, 때로는 우리를 죽일 만큼 절망적이다. 



2021년에 타계한 미국 작가 조앤 디디온은 ‘푸른 밤’이라는 책에서 딸의 삶과 죽음을 현재적 시점으로 되돌아보고 있다. 그러나 뛰어난 저널리스트이자 에세이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존경받는 작가인 그녀의 책에는 온통 딸에게 던지는, 그래서 결국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가득하다. 딸의 사진, 딸이 남겨놓은 글, 딸이 입던 옷 등을 통해 그녀는 당시 살아있던 딸에게 질문을 끝없이 던지지만 그녀의 질문은 고스란히 자신에 대한 질문이 되어 되돌아온다. 당연하다. 대답에 참여할 당사자인 딸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 속 아담의 부모, 아담, 해리는 모두 답을 들어야 하는 질문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다. 자신들의 죽음의 순간과 아담에 대한 걱정,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인정여부와 부모의 사랑에 대한 확신, 홀로이 버림받은 채 비참하게 죽지 않았다는 위안. 이들이 끝없이 세상을 떠돌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가슴속에 반드시 답을 알아야 할 질문을 지녔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에게는 반드시 답을 알아야 하는 질문이 없는가? 만일 우리가 삶의 표면 한 지점을 힘겹게 붙들고 있는 듯이 느끼고 있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삶의 의지가 아니라 삶 자체를 가능하게 할 근본적인 답일지 모른다. 



3. 마침내 빛이 되다


그토록 소망하던 답을 듣게 된 순간 엄마의 몸에는 빛의 테두리가 생긴다. 자신이 홀로 버림받은 채 죽어간 것이 아니라는 아담의 위로에 해리의 몸에도 역시 빛의 테두리가 생긴다.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고 부모의 사랑을 확인했으며 이제는 자신도 누군가와의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아담의 가슴속에는 수 십 년간 맺혀 있던 응어리가 풀려나간다. 그들은 이제 원하던 답을 구했고, 그제야 비로소 평안을 얻어 있어야 할 곳으로 옮겨간다. 



우리의 삶은 일견 단순해 보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감당하기 불가능해 보이는 시련들을 견뎌 나가는 시간의 연속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삶을 포기하지 않고 이어 나가려면 결국 시련을 야기한 문제 자체를 해결해 나가는 수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그렇게 하나씩 장애물을 치워 낼 때마다 우리는 새로운 단계의 인생으로 나아간다. 



영화 <노매드 랜드>의 주인공 펀은 남편이 죽고도 오랫동안 그와 함께 지낸 집에서 그에 대한 기억과 함께 살았다. 그녀에게 그 집은 남편 그 자체였기에 집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간다는 것은 남편에 대한 기억을 잃는 것, 곧 그와의 ‘진짜’ 이별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펀은 자신의 현재를 과거로 덮어두어 결과적으로 흘러가려는 삶을 억지스럽게 막고 말았다. 그녀의 삶이 다시 흐름을 찾게 된 것은 그녀가 이별을 받아들이고 집을 나서면서 부터였다. 그때부터 그녀는 삶을 새로이 써 나갈 수 있었다.



고통에 차서 낮은 시간을 지나가고 있을 때, 외로움과 고통으로 어두운 장막 뒤에 숨어 있을 때조차 인간인 우리는 자신을 놓고 싶지 않은 본능적 욕망을 지니고 있다. 영화 속 해리의 말처럼 가끔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자신을 포기해 버리기도 하지만, 그런 경솔한 행동은 역시나 해리처럼 여전한 외로움과 절망에 찬 영혼이 되어 세상을 겉돌게 할 뿐이다. 삶의 여정 속에서 갖가지 시련과 아픔을 지닌 우리가 당장에 빛이 될 수는 없을지라도 그토록 구하던 답을 찾고, 갈망하던 사랑을 만나면 그때에는 우리도 빛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빛이 되는 순간에의 욕망은 결국 우리를 빛으로 수렴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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