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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 에세이스트 J Jun 03. 2023

현재를 찾아 떠나는 이들의 대 서사시

노매드랜드(2021)

천지가 온통 새하얗게 꽁꽁 얼어붙어 있다. 초로의 한 여인이 어느 창고에서 자신의 차로 짐을 옮겨 담고 있다. 조금의 틈이라도 벌어지면 금세 터져 나올 것 같은 슬픔을 억지로 욱여넣고 억누르고 있는, 거칠고 주름진 얼굴의 여인은 짐의 일부는 창고에, 일부는 자신의 허름한 밴에 담고 길을 나선다. 이 여자는 왜 떠나는 것일까? 여자는 어디를 향해 떠나는가?

영화 노매드랜드는 2021년에 개봉한 미국영화로 중국의 여성감독 클로이 자오가 연출을,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주인공 펀역과 제작을 맡았으며 그 해에 아카데미를 비롯한 전 세계 주요 영화제에서 무려 211관왕이라는 경이적인 성적을 기록한 영화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영화의 힘은 마법 같은 연출과 대체불가의 연기력 외에도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진정성있는 스토리에서 더욱 크게 발산된다.        


2008년 미국에서 시작한 세계 금융 위기는 많은 기업들을 파산으로 내몰았고, 이것은 연쇄적으로 서민들의 삶을 흔들어 놓았다. 이것은 특히 주택담보대출과 연관되어 시작되어 많은 이들을 빚더미에 앉게 했고 대출을 갚을 수 없는 사람들을 자신의 터전에서 쫓겨나게 만들었으나, 현금이 풍부했던 일부 계층에게는 헐 값에 시장에 나온 부동산들을 사들일 수 있는 호재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영화의 배경이 되는 네바다주의 엠파이어 역시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는다. 금융위기로 인해 마을 전체의 경제를 움직였던 석고산업은 몰락했고 그 지역 전체는 사실상 유령도시가 되었으며, 심지어 우편번호마저 빼앗기면서 행정구역에서 사라질 운명에 처한 것이다. 엠파이어에 사는 사람들은 먹고살 수 있는 수단이 사라져 버린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더 이상 머무를 곳조차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이 영화의 초반에 여자가 떠나야만 했던 물리적인 이유였다. 여자는 자신의 선택으로 떠나야 했던 것이 아니다. 

 

내가 알던 내 삶에서 원치 않게 내쳐졌다. 내쳐지기 전의 내 삶의 질은 당장의 문제가 아니다. 당장 시급한 문제는 알량한 목숨의 부지를 위한 실존적 몸부림에 있다. 여자의 거칠고 무표정한 얼굴처럼 여자의 삶 역시 표정을 잃었다. 추운 길바닥에서 그나마 바람을 막아주는 밴이 있기에 대충 한 끼를 때우고, 이 대충의 한 끼라도 확보하기 위해 일당을 주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는다. 그나마도 차를 세울 수 있고 일을 주는 곳이 있기라도 하면 다행이건만, 그조차 항상 녹녹하지는 않다. 여자에게 내일은 오늘에 뒤이은 다음 차례의 오늘일 뿐이며, 뜨고 지는 해에 따라 마땅히 맞이해야 하는 시간의 주기일 뿐이다. 여자의 눈은 공허하다. 눈앞의 것들을 바라보는 듯 하지만 마음은 시선을 뛰어넘어 다른 시공간으로 흘러 들어 간다. 여자의 삶은 시선의 바깥쪽에 머문다. 여자는 자신의 삶을 보지 못한다. 그러니 살아있음을 느낄 수 없다. 여자는 살아있는 것인가? 여자는 마침내 시선 안에서 자신의 삶을 발견할 수 있을까? 현재를 현재에서 찾고자 떠나는 여자의 여행을 따라가 본다. 


 

1. 기억과의 공존 : 용해되어 버린 현재

 

공간은 우리에게 단순한 물리적 장소 그 이상을 의미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나 한 개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시절을 보냈던 공간이라면, 그곳은 더 이상 차가운 시멘트 덩어리의 막힌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공간이 품은 온기를 기억하며 웅크리며 살던 여자에게 공간은 나와 나의 기억, 나의 현재가 뭉뚱그려진 한 덩어리가 되어 버린다. 이쯤 되면 공간과 여자가 분리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공간을 벗어난다 해도 공간과 이별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어린 시절 사랑에 빠진 남편과 함께 자신의 고향을 망설임 없이 떠나와 오랫동안 가족을 등지고 살아왔던 여자가 뜻하지 않은 사고로 남편을 잃었다. 아무것도 없었던 황무지에서의 삶이었지만 남편이라는 존재, 그 하나만으로도 삶 속에서 내내 행복했던 여자는 다시없을 행복의 기억을 주었던 공간을 떠나지 못한다. 문 하나 사이로 펼쳐져 있는 끝도 없는 황무지는 삶에 대한 가능성이라기보다는 거대한 미지의 두려움이었다. 단지 한 발만 내디디면 어디로든 떠날 수 있었으나, 떠밀려서 떠나야 하는 그 순간이 오기까지 여자는 감히 떠나지 못했다. 여자에게 떠남은  단순히 공간을 벗어난다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전 인생을 저버리는 행위였고, 자신을 의미 있게 해 준 소중한 기억을 뒤에 남겨두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죽을 듯이 기억을 부둥켜안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여자는 결국 떠나야 하는 순간까지 공간에 놓여있던 기억과 물건을 완전히 처분하지 못하고 남겨둔다. 심지어 이동을 해야 하는 처지임에도 항상 지니고 다닐 만큼의 물건을 차량에 싣고 수시로 공간의 안녕을 확인한다. 그렇게 여자는 공간을 벗어났어도 공간의 기억과 이별하지 못한 채 길을 나섰다.   

 


2. 존재의 단상 : 현재로의 회귀

 

시는 인생의 육성과 같다고 신형철은 말한다. 그만큼 삶의 목소리를 실제적이고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일 것이다. 게다가 셰익스피어의 시들은 의미의 파악을 위해 삶 전체의 경험 이외에도 지식을 요한다. 작품 전체의 이해와 더불어 16세기 언어자체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있어야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시를 자유자재로 나의 삶에 투영한다는 것은 따라서 자신의 삶 안팎에서 삶을 지적으로 관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여자는 다양한 직업을 통해 자신의 삶을 꾸려왔다. 그중 하나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우연히 마트에서 만난 아이가 읊조리는 멕베드의 한 구절이나 자신의 결혼식에서 사용했다는 셰익스피어의 그 유명한 18번 소네트는 여자가 남편과의 기억을 붙들고 살면서 깊게 묻어두었던 자기 자신의 삶을 불러온다. 특히 셰익스피어의 18번 소네트는 셰익스피어가 여름보다 찬란했던 사랑의 불멸한 기록을 위해 쓴 시이다. 이 시를 여자가 읊조릴 때 우리는 여자가 자신의 인생의 한 지점에서 느꼈을 행복이 얼마나 커다랗고 열정적이었는지 단박에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이 시를 통해 여자와 우리가 함께 알게 되는 것은 인생의 한때 우리를 찾아오는 행복은 우리의 젊음과도 같아서, 전제된 한시성으로 인해 더욱 찬란하고 더욱 매혹적이지만, 일정시간 지나가면 필멸한다는 것이다. 


젊을 때의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파멸당하지 않을 불멸의 존재인 듯 느끼게 되고 심지어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이것을 소망하듯, 우리의 삶에 한때 찾아오는 행복과 사랑 역시 그 짧은 순간에 대한 우리의 간절한 지속의 기원에도 불구하고 영원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필멸할 인간을 위한 불멸의 저장장치로서 시가 존재하는 것이며, 여자는 인생의 후반부에 와서야 시를 완벽하게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홀로 떠돌던 여자는 자신의 운명이 유독 자신에게만 가혹하다고는 느끼지 않을 단계에 왔다. 그리고 자신이 껴안고 살았던 어느 한 시기의 기억은 그 자체로 소중했다는 것, 그러나 끝나버린 여름은 반드시 가을과 만나야만 한다는 것, 그렇게 해야만 다시 여름을, 다시 기억을 만날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3. 광활한 현재로의 한걸음 : 그럼에도 현재를 향해

 

읽지 않고 오랫동안 보관했던 책들을 처분한다는 것은 사람과의 인연을 정리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책을 발견하고, 소중하게 품에 넣어 집으로 가져와 책장에 꽂아두고, 오래되어 그 존재를 잊었다가도 문득 바라본 그곳에 가지런히 서있는 그 듬직한 모습만으로도 위안을 받는다. 그럼에도 가끔은 새로운 필요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처분해야 하는 날이 오기도 한다. 여러 번의 망설임과 한두 번의 자기변명을 물리치고 마침내 책장에서 빼내고 나면 지배적인 서운함속에서 미약한 홀가분의 기운을 감지하게 된다. 어느새 홀가분함이 서운함을 이겨나가고 우리 역시 계속되는 삶의 재배치 속에서 삶의 패턴을 바꿔나간다.



여자는 우연히 만난 한 남자를 통해 과거 남편과의 삶에서 가졌었던 위안, 즉 홀로 됨의 고단한 삶이 아니라 공존하여 외롭지 않을 삶의 가능성에 자신을 맡겨보고자 한다. 그러나 이 시도를 통해 여자는 자신이 이미 과거의 삶의 패턴과 작별할 준비가 되어있음을 알게 된다. 남편이 죽고 스스로 자신을 기억 속에 감금하며 기억이 남긴 일말의 온기를 필사적으로 지켜내던 삶이 아니라, 여전한 기억과 함께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나갈 단계에 왔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여행의 마지막에 다시 찾은 자신의 공간. 그곳에서 여자는 남겨두었던 모든 짐을 처분하고, 자신의 기억이 머물렀던 모든 공간들을 돌아보면서 비로소 자신이 현재에 서서 그것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홀로 할 현재는 여전한 과거의 기억으로 인해 고독하지만은 않을 것임을 알게 된다. 여자는 이제 문을 열고 집 앞에 펼쳐진 광활한 대지로 한발 내딛는다. 어디로 갈지, 무엇이 기다릴지는 여자 역시 알 수 없다. 다만 여자의 앞에는 미래로 이어질 현재의 길만이 곧게 뻗어있을 뿐이다. 이제 여자에게 내일이 온다. 

 

모든 것에 궁극적인 작별이란 없다고 한다. 우리가 삶의 길을 가며 만나게 되는 작별은 그저 시차가 다른 작별들일뿐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현재란 작별과 작별사이에 놓여있는 시간이고, 이것이 수많은 작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현재를 살고 있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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