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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 에세이스트 J Jun 03. 2023

상실과 후회의 바다, 그리고 유영하는 구원

더 웨일(2023)

우리의 일생동안 우리는 여러 차례 상실과 후회를 경험하게 된다. 크고 작은 그 모든 상실과 후회는 그 크기와 상관없이 우리 내면의 어딘가를 휩쓸고 지나가며 무언가를 지워내고 마침내 우리의 내면을 비워버린다. 그 공허함은 우리를 망연자실하게 만든다.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혹은 내가 속해있다고 믿고 있던 세상이 한순간에 멈추어 선다. 나는 이 세상 속에 존재해야 하나? 애당초 존재 자체에 의미가 있기는 한 걸까?  

    

영화 미이라 시리즈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으나 그 후 오랜 시간 우리의 관심밖에 있었던 브렌든 프레이저가 영화 더 웨일로 돌아왔다. 그의 기적 같은 복귀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놀라움과 감동을 받았으나, 정작 우리에게 더 큰 감동을 주었던 것은 그가 각종 단체의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했던 수상소감이었다. 영광 뒤 찾아왔던 지난했던 그의 과거에서 벗어나 다시금 세상으로 나온 그의 인생의 항로가 마치 영화 더 웨일의 찰리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영화화를 일찌감치 결심하고도 남자주인공 찰리역에 맞는 배우를 찾지 못해 10년을 기다렸던 대런 애러노프스키감독의 간절함은 결국 결실을 맺었다. 그리고 우리는 인생에 오직 한번만 할 수 있다는 연기를 보여준 브랜든 프레이저의 찰리를 통해 이 뛰어난 영화를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1. 상실과 후회라는 거대한 고래     

작품 속 찰리는 사랑을 택하면서 가족을 저버린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선택은 연인의 죽음으로 인해 파국으로 치닫는 계기가 되고 만다. 거기에 더해, 자신을 추앙하던 어린 딸을 버렸다는 그의 죄책감은 결국 자기 파멸의 길로 그를 들어서게 한다. 오갈 곳 없는 자기만의 세상에 스스로 갇혀서 그는 무슨 생각으로 삶을 이어 나간 것일까?      


우리는 누구나 상실을 겪고, 우리는 누구나 후회할 만한 선택을 하지만, 대부분의 우리는 삶을 회복하는 데에 어느 정도 성공한다. 그러나 찰리의 선택은 불가역적인 것이어서 다시는 이전의 삶을 회복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에게는 복구에 대한 욕망 자체가 없었을 수도 있다. 내가 아는 유일한 삶의 장, 내가 속한 유일한 세계가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다고 스스로 판단하게 될 때, 우리는 그 삶의 손짓을 거부하고 스스로 고통을 가하며 단절을 택하는 것이 모순임을 알면서도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될 수도 있다. 찰리는 이처럼 자신을 봉인해 버림으로써 자기 파멸을 주저하지 않았고, 희망과 사랑이 빠져나가고 후회와 슬픔, 자책만이 가득해져버린 그의 몸은 그의 고통의 크기만큼이나 팽창되어 간다. 고래만한 그의 몸은 고래만한 크기의 고통이자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채울 수 없는 공허의 크기인 것이다.   


2. 타인을 염려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인간



이 영화에는 찰리 이외에도 상실과 자책의 고통으로 살아가는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한다. 홍 차우가 맡은 리즈라는 역할의 인물은 찰리만큼이나 복잡한 감정을 지니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10대에 입양되어 미국에 들어온 리즈는 집안의 종교와 맞지 않아 가족과 소원한 채 살아가던 사람이었으며, 찰리의 연인이었던 자기 오빠의 자살을 막지 못한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오빠의 연인이었던 찰리의 자기 파멸을 어떻게든 지연시키고 막아보자 고군분투하는 유일한 지원군이기도 하다. 다 죽어가면서도 병원 진료를 거부하고, 오래전 떠나온 딸을 굳이 불러들여 지난 모든 세월 딸이 지녔던 원망과 분노를 한꺼번에 감당하려는 찰리를 보며, 그녀는 찰리를 염려하고 도왔던 자신의 지난 세월에 대한 허망함과 함께 말할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을 느낀다. 그녀는 왜 이렇게까지 찰리를 돕고 싶었을까? 자기만족을 위해서일까? 혹은 또다시 느껴야 할 무기력한 죄책감을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 였을까?   

   

이 질문의 답은 찰리의 다음 대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People are incapable of not caring”. “사람은 남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죽어가면서도 딸을 향한 염려와 희망을 놓지 않는 찰리, 오빠의 자살로 큰 충격을 입은 상태로도 끝까지 찰리를 도우려는 리즈. 우리는 이들을 통해 상처투성이의 삶을 어떻게든 그러안고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가진 원동력이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 그 자체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남을 염려하는 마음을 이미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최후의 순간 혹은 최악의 순간에 기억해야 하는 단 하나의 사실은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지 모른다.  


3. 구원은 스스로의 믿음에서 비롯된다

찰리는 자신의 딸 앨리가 8살 때 집을 떠나면서, 한 번도 그녀와 연락을 하거나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 자신의 생이 다했다는 것을 깨닫고 그녀를 다시 한번 자신의 인생으로 불러들인다. 앨리가 자신의 죽어가는 흉측한 모습을 보고 어떤 말을 할지 뻔히 예측을 했겠으나 그녀가 어릴 적 썼던 모비딕에 대한 글 속에서 발견했던 순수한 선함을 이제 마지막 가는 자신의 여정에서 그녀에게 알려주고 싶어 하는 것이다. 찰리의 이러한 행동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이제라도 용서를 구하고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자기 구원을 위한 최후의 구차한 몸부림이었을까?      


이 작품은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구원의 문제를 생각해 보게 한다. 인간은 무엇에 의해, 혹은 누구에 의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아니, 구원 자체가 가능하기는 한 걸까? 영화 속 여러 인물들은 사실 구원이 가능하다면 구원을 받아야 할 처지에 놓여있다. 연인의 죽음과 딸을 버렸다는 죄책감에 자기 파멸의 삶을 살아온 찰리, 오빠의 자살에 대한 죄책감과 찰리의 자기파멸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하는 리즈, 아빠가 떠난 뒤 세상에 대한 원망만 가득한 앨리 등 모든 등장인물은 구원의 대상으로 비춰진다. 그러나 결국 이 영화에서의 구원은 외부의 누군가에 의해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찰리의 구원은 앨리에게 선함과 자신의 재능을 믿게 하며 그것의 진정성을 증명하기 위해 불가능했던 발걸음을 한 발 한 발 내디뎠던 자신의 의지와 믿음에서 기인했다. 리즈의 구원은 결국 원하는 죽음을 맞고자 하는 찰리를 인정하는 순간에 이루어졌다. 앨리의 구원은 아빠라는 존재를 회복하고 자신의 내면을 열어 보이던 그 순간에 이루어졌다. 결국 우리의 구원은 누군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면의 힘으로, 오직 나에 대한 나의 완전한 믿음을 나 스스로 회복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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