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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 에세이스트 J Dec 26. 2023

슬픔은 용해되어 삶으로 흐른다

영화 <나의 사소한 슬픔, All My Puny Sorrows 2021>

영화 <나의 사소한 슬픔>은 캐나다 작가인 미리암 테이스(Miriam Toews)가 2014년에 발표한 동명의 소설인 ‘All My Puny Sorrows’를 원작으로 한다. 


작가의 실제 경험이 반영된 자전적 소설인 이 작품에서 작가는 죽음과 삶, 가족과 트라우마, 메노나이트 교파와 캐나다 병원 시스템의 문제 등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작품 전체를 너무 무겁게 끌고 가지는 않는다. 


영화의 감독인 마이클 맥고완 역시 원작의 어조와 내용을 충실히 반영하여 자칫 무겁고 우울할 수 있는 영화에 적절한 유머를 더해 매력적인 깊이를 더했다.  


1. 나의 사소한 슬픔을 받아냈었던 당신

작가는 작품의 제목을 왜 ‘나의 모든 사소한 슬픔’이라고 지은 걸까? 작품의 내용을 알고 나면 절대 사소할 수 없는 슬픔을 사소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은 제목에 궁금함이 생긴다. 


이 작품의 제목은 영국의 시인 사뮤엘 콜리지(1772-1834)의 시에서 유래한다.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사뮤엘 콜리지가 친구였던 찰스 램(1775-1834)에게 보냈던 시의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사뮤엘 콜리지는 친구인 찰스 램이 아픈 누이를 돌보며 힘들어하자, 자신의 두 형제자매를 떠나보내고 그들을 애도하며 썼던 원시를 수정하여 찰스 램에게 보냈다고 한다. 작가가 인용한 부분은 사뮤엘이 찰스에게 보낸 시의 앞부분이다.


나도 하나뿐인 누이가 있었어 — 
그녀는 나를 너무나도 사랑했고, 나도 그녀를 너무나 사랑했지! 
그녀에게 나는 내 모든 사소한 슬픔을 쏟아냈었어, 
(마치 간호사의 팔에 안긴 아픈 환자처럼)


시를 살펴보니 그제서야 작가가 제목을 지으면서 느꼈을 온갖 심정이 한 번에 이해가 된다. 마음의 병이 깊어 늘 죽음의 침상에 누워있었던 것 같은 누이의 비애를 시인은 누이의 살아생전에는 알지 못한다. 


누이가 죽고 나서야 자신이 쏟아냈던 그 하찮고 시시콜콜한 불행이 누이의 궁극적 비극에 비해 얼마나 하찮았는지, 자신이 아픈 누이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그런 자신의 말을 들어주며 누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지 시인은 뒤늦게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영화 속 주인공인 욜리 역시 언니인 엘프에게 끝없이 소소하고 일상적인 자신의 불운과 비애에 대해 쏟아붓는다. 정작 엘프는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의 운명에 한없는 비극에 빠져 있으나 내색지 않는다. 


그녀는 그저 욜리의 말을 경청하고 위로하며 지지할 뿐이다. 엘프가 자신의 슬픔을 내보인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단 한 번뿐이었다.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지 않고 마주하러 가는 길에 말이다. 


2. 비극의 시대에 일어난 일은 모두 비극인가 

영화의 시작은 아버지의 자살 장면으로 시작된다. 초조하기보다는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처럼 차라리 침착해 보이기까지 한 표정으로 기차를 기다리는 아버지. 그리고 정확히 10년 후 같은 장소에서 엘프 역시 기차를 기다리게 된다.


영화의 곳곳에서 삶을 말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인류라면 누구나 죽는다는 것은 자명하다, 누구나 죽음을 이야기해도 막상 죽음을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언젠가 다가올 죽음을 그저 기다릴 뿐이다’. 


대부분의 순간에는 동의가 되는 말이기도 하나 아주 드물게 불행한 어느 날에는 의문이 들기도 할 것이다.


 “왜 삶을 멈추면 안 되는가”, “죽음이 나를 자유롭게 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삶의 가장 낮은 지점을 지나는 날들, 가도 가도 다시 오르지 못할 것 같은 절망감은 때로 우리 자신을 우리에게서 앗아갈 수도 있다. 용기를 내라는 등의 희망적 위로가 도리어 내가 가진 절망의 실재에 대한 반증이 되어 버릴 수도 있고 말이다. 


삶의 기간이 나에게는 오로지 비극뿐이라고 생각되는 날들이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비극이라고 이미 규정해 버린 삶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을 그저 비극의 일원으로 치부해버리고, 그 낱낱이 보내오는 새로운 메시지를 지나쳐버리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영화는 바로 이런 지점에 필요한 또 하나의 인용문을 통해, 비극이라고 규정된 삶 속에서도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뚫고 살아나갈 수 있는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덤덤하게 제시한다. 


우리 시대는 본질적으로 비극적인 시대이기 때문에 우리의 시대를 비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대격변이 일어났고, 우리는 폐허 속에 있으며, 새로운 작은 희망을 갖기 위해 새로운 작은 서식지를 건설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미래로 가는 길은 순탄하지 않지만 우리는 장애물을 피하거나 뛰어 넘습니다. 아무리 많은 하늘이 무너진대도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 D.H 로렌스, ‘채털리 부인의 연인’-     


3. 슬픔의 층위(Levels of Sorrows)

슬픔이라는 커다란 감정은 다른 여타 감정과 마찬가지로 그 안에 다양한 폭과 깊이를 가지고 있다. 그 다양성은 여러 개의 동의어에 나뉘어 담겨 있지만 그마저도 부족하여 다시 구차할 정도의 수많은 수식어의 도움을 받는다.      


한마디로 우리의 슬픔은 단순하지 않으며 경중을 따질 수도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슬픔은 인간이 살면서 갖는 네 가지 감정 즉,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애를 담당하고는 있으나 감정의 발화순간부터 지속되는 기간까지를 보면 나머지 모든 감정을 압도하고 있으며, 기쁘면서 슬프고, 화가 나면서 슬플 수는 있으나 슬프면서 다른 감정을 수용할 수 없다는 점에서 보면 슬픔은 순수하게 균질한 단 하나의 감정이 될 수도 있다.      


슬픔은 불행과는 다르며 슬픔의 유무가 행복의 질에는 관여할 지라도 행복 그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      


슬픔은 지속적이고 일상적일 수도 한시적이고 격동적일 수도 있다. 슬픔의 크기와 지속기간, 슬픔이 발생하여 머무는 위치는 때로 우리의 삶을 이어나가게 할 수도 그렇지 않게 할 수도 있다.      


슬픔은 이렇게 복잡다단하고 다층적인 모습으로 우리 삶의 전 기간을 나뉘고 뭉치어 관통한다.      


슬픔의 합은 어쩌면 우리 삶의 합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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