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랑스 드빌레르 (2023)
최근 2-3년 간 꽉 막혀버린 것 같은 시간을 겪어나가면서 삶을 바라보는 태도와 관점이 많이 바뀌게 되었다.
떠나고 싶은 것들에게 지겹도록 끈질기게 발목이 붙잡혀 떠난 것도 머무는 것도 아닌 시간들을 보내는 나에게 다 내려놓으라는, 그리고 너를 너답게 바라보고 현재를 인정하라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한때 나를 붕뜨게 했던 헛된 꿈, 오랜 시간 머물렀던 누군가의 곁, 초조함에 무엇도 실제적으로 이룬 것 없는 비루한 야망의 조각...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분간하지 못하고 청춘의 어느 한가운데에서 표류하던 자라지 못한 미성숙한 나.
내가 가졌고 가졌다고 믿었던 모든 것들이 실은 실체 없는 막연한 무엇이었고, 힘든 시간을 지나가며 한 겹 씩 나를 벗겨나가다 저만치 웅크리고 들어앉아 바닥만 내려보고 있던 나라는 존재를 발견하게 되었다.
참, 작은 존재였구나. 많이 힘들었구나, 생각보다. 얼마나 울었으면 얼굴이 이렇게 얼룩으로 꾀죄죄하냐. 왜 널 미리 만나지 못했을까? 너무 늦지는 않은 거겠지? 이제라도 난 널 지켜주고 싶다. 안아주고 일으켜 주고 싶다. 네 눈빛을 봐. 네 안에는 아직 네가 남아있잖아. 아직 좀 더 슬퍼하고 싶다고?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다고? 그래. 그러자. 너 하고 싶은 대로 하자. 그래도 이번만큼은 외롭지 않을 거야. 내가 저 끝에서 끝까지 너를 기다릴 테니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와. 나는 널 지킨다... 나는 날 지킨다.
흘려보내고 싶은 것들이 많았던 내게 이 책의 제목은 아! 하는 탄식을 일으켰다. 눈물이 순간 나왔다. 내 삶은 멈춘 게 아니잖아. 그렇지. 흐르고 있었어. 암초를 만난 것이었을 수도 거친 파도로 뒤덮였을 수도 있었겠지만 내 삶은 내 고통보다 넓고 커다랗지. 내 고통은 내 삶의 일부일 뿐야. 나는 흐르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이 고마웠다. 내가 가장 힘든 시절 아침마다 자신의 시간 기꺼이 내주시며 정성껏 커피를 내려주시던 퇴임한 선배님의 그리운 마음 같았다.
이 책의 저자는 프랑스의 철학교수이다. 그에 따르면 그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좋았던 시절이 아닌 어려웠던 시절이라고 한다. 그 시절 매일 바닷가에 나가 한없이 바다를 마주하며 삶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을 작가의 모습이 책의 모든 곳에서 절절하게 묻어난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책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저자가 바다에서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바다에 관련된 모든 것에서 생각을 이끌어 냈다는 점이었다. 한 가지 소재를 가지고 이렇게나 다양하고 깊게 생각을 이끌어낸 그의 대단한 집중력과 통찰, 아이디어가 작가로서의 그를 존경하게 만듬과 동시에 나라는 초보 작가에게 한없는 부끄러움을 안겨주기도 했다. 글이란 쉽게 써 내려가서는 안 되는 것임과 동시에 자신의 한 순간을 온전히 바쳐야 하는 것임을 그를 통해 또 한 번 배우게 되었다.
다양한 것들에서 그는 삶의 지혜와 통찰을 전해주지만 나에게 가장 와닿았던 것은 '방파제'파트였다. 그가 여기에서 말하는 방파제는 비유적인 의미로, 파도를 막아주는 방파제처럼 인생의 시련을 막아주는 방파제를 마음에 세우고 힘들 때 그곳에 의지하는 존재이자 장치로서의 방파제다. 그는 이런 지혜를 주기 위해 다양한 예시를 들고 있는데, 방파제에서 든 예시는 '사랑의 상실'이었다. 다른 파트에서와는 달리 글에서 저자의 '진짜 열기'가 느껴지는 걸 보면 그가 밝힌 그의 힘든 시기가 누군가와의 이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같은 것으로 힘들었던 나에게 너무나 와닿았다는 것이 나의 근거이다).
사랑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바다뿐이다. 바다도 사랑처럼 위로가 되면서 절망이 된다. 바다도 사랑처럼 기쁨을 주면서 모욕감을 안겨준다.... 사랑은 등대이자 암초, 불꽃이자 칼날이다. 사랑은 한없이 주다가도 거칠게 모든 것을 앗아간다.... 참으로 치명적이다... 사랑은 태어나 활짝 피었다가 퍼석하게 시들고 끝내 사라진다. 삶에서 실연의 상처만큼 위로가 되지 않는 상처가 있을까?
실연의 아픔이 참기 힘든 이유는 사랑에 빠질 때와 같은 증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오직 헤어진 연인만 생각난다...
과장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연의 상처는 죽음과 같지 않을까? 그렇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니 그전에도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맹세하던 그 사람에게 나는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다. 너무나 빨리 잊히고 지워진다. 그렇기 때문에 방파제 기술이 꼭 필요하다. 내 안에 방파제가 있다면 실연을 겪어도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는다. 나 자신을 부정하지 않고 계속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 본문 중 '방파제' 인용-
보라. 얼마나 명석하고 정확하게 실연의 성격에 대해 진단을 하는가. 그의 글은 다른 파트에서도 이처럼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각각의 소재(파도, 해적, 돛 등)에 맞추어 유연하게 풀어나간다. 그러면서도 지나치게 교훈을 주려거나 지식을 드러내거나 지혜를 강요하는 태도를 갖지는 않는다. 물론 자신의 깨달음을 정리한 글이니 만큼 적절하게 단정적이고 설득적인 어조를 사용하였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이상하게도 알랭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과 영화 '노매드 랜드'가 떠올랐다. 인적 드문 조용한 바닷가 모래밭에서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고 누워있는 내 모습도 겹쳐 떠올랐다.
마음속의 '쉼'을 갈구하는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