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설, 책과이음(2023)
가깝게 지내는 출판사 겸 서점의 대표님을 오랜만에 뵈러 갔다 표지를 장식한 여인의 모습에 끌려 진열된 책을 가져와 읽어보았다.
앞날개에 적힌 작가의 소개는 툭하니 대충 몇 자 던져 놓은 것처럼 짧았지만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그 느낌만은 제대로 전해졌다.
'사람이 많은 곳은 싫어하지만
많은 사람 앞에서 이야기하는 건 좋아한다
세상만 볼 때는 사나운 꿈을 꾸고 아침을 맞았지만
고양이와 내면을 보면서부터 평온한 꿈을 꾼다
사는 대로 쓰고 쓰는 대로 살고 싶다'
흠. 직설적이고 거침없고 그치만 무언가 달관하고 초월하며 사시는 분이겠다... 이런 생각으로 프롤로그를 펼쳤다. 어린 시절 자신의 아버지의 이야기로 시작을 해서 어머니와의 결혼 생활로 이어지더니, 결국은 특이하고 이상한, 어쩌면 일반적이지 않은 자신의 결혼, 이혼, 재결합의 이야기를 책에 담았다고 서술해 놓고 있었다.
작가는 27살에 운명적인 사랑과 헤어지고 그 이별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바로 다음 해에 결혼할 만한 대상이라는 나름의 계산으로 현재의 남편과 속전속결로 결혼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혼할 당시 돈도 잘 벌고 무난했던 남편은 도박에 빠져 엄청난 빚을 지게 되었고, 그리하여 작가는 결혼 후 2년도 채 안되어 갓 태어난 아이를 데리고 나와 살기 위해 온갖 일을 해가며 버텨왔다고 한다. 그러나 이혼 후 5년 정도 지난 시점부터 남편이 자신과 아이의 주변을 맴돌며 남편과 아빠의 역할을 '과하지 않은 범위'에서 해왔고, 마침내 15년 후 그러니까 이혼 후 20년이 지나 둘은 재결합을 하여 현재 재결합 7년째를 맞이하고 있다는 것이 이야기의 골자이다.
이 작품은 김설작가의 세 번째 작품이라고 한다. 청소, 설거지, 대리운전까지 살기 위해 온갖 일을 하다가 어떤 경로로 작가가 되었는지가 사실 읽다 보니 가장 궁금했는데 (병아리 작가로서) 이 부분이 나와있지 않아 내 입장에서는 살짝 아쉬웠다 (물론 이 주제가 아니니 당연하다).
내가 이 작품을 고른 것은 제목이 아니라 표지 때문이었다. 이 작품은 핀란드 작가인 헬렌 슈제르프벡이 1905년에 발표한 'The Seamstress (The Working Woman)' 즉, '재봉사(노동하는 여인)'이다. 나무의자에 앉아있는 초로의 여인, 검은 옷을 입고 무릎에 두 손을 모은채 지긋이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 같은 그 여인의 모습이 내 마음에 깊게 와닿았다. 피로한 노동의 삶에 던져진 가냘픈 여인. 한 차례 일을 끝내고 다음 일감을 기다리며 앉아있는 걸까, 아니면 마침내 하루를 마감하고 잠시 자기만의 시간을 갖고 있는 걸까. 평온하기 보다는 차분하게, 슬프기보다는 초월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여인의 모습은 지금의 나를 궁금하게 만들었다. 나는 어떤 상태일까. 나는 지금 멈춰 서 있는 걸까. 아니면 다음을 위해 나만의 시간을 갖고 있는 걸까. 나는 앉아있나? 지쳐있나? 내 마음속 나는 어떤 목소리를 내고 있나. 말없이 앉아있는 이 여인은 이상하게도 나에게 많은 말을 걸고 있었다.
출판사와 작가가 하필 이 작품을 표지에 사용한 것은 나와는 다른 감상 포인트와 이유가 있겠으나, 작품에서 느껴지는 보편적 인상과 감상이 작가의 지난한 삶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사용했을 거라는 분명한 이유를 떠올려 본다면, 작품을 읽기 전, 후 그림을 가만히 응시하며 그림 속 여인의 분위기와 마음을 짐작해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이 작품은 어떤 독자들에게 가장 와닿을까? 우선 나는 아니라는 결론이다(나의 경험, 현재의 고민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작품이 주로 남편과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결혼을 경험한 사람들(혹은 이혼이나 재결합), 그중에서도 결혼이나 배우자를 선택한 자신의 결정 때문에 힘들어하는 분들에게 가장 와닿고 도움이 될 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55세인 작가의 나이 즈음에서 마음을 내려놓고 수용과 포기, 인정과 체념을 오가며 자신의 인생을 '그럼에도' 씩씩하게 희망적으로 가꾸어 가는 혹은 가꾸고 싶은 분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맞춤형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전히 자신의 선택과 그 결과를 놓고 현재 진행형으로 투쟁 중인 분들에게 이 책은 다소 먼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다. 또한, 작가가 재결합을 결심한 이유가 명시적으로 나와있지 않다 보니 (작가 스스로에게도 명시적이지 않을 수 있다), 재결합 자체에 반감이 들거나 동의가 안된다면 책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아직 삶을 모르겠다. 그래서 순간순간 나는 힘들고 가끔은 수많은 갈림길 앞에서 선택의 에너지를 잃어버린 채 그저 주저앉아 버릴 때가 많다. 이 책은 이런 나에게 세상의 한 구석에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는 또 하나의 인생을 알게 해 준 책(작가가 에필로그에서 썼듯)이었다.
이 글을 쓰면서도 나는 내 앞에 놓인 책의 표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여인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