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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사람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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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 에세이스트 J Sep 18. 2024

오월의 길 위에서

무더위를 헤치고 밤길을 걸어 집으로 가는 길, 내 앞으로 걸어 올라오는 한 남자를 보게 되었다. 

수트 차림의 무거워 보이는 발걸음. 

등뒤로 쏟아지는 가로등 불빛 탓에 형체만 보이던 그 모습은

순간 나를 데려가 다른 길 위로 올려놓았다. 


십수 년 전 도서관에서 스터디를 하고 있던 시절, 갑작스러운 전화를 받고 나는 급하게 스터디실을 뛰어나갔다. 남동생의 전화였다. 회사에 막 입사한 동생이 모처럼 일찍 퇴근길에 나섰는데, 현관 열쇠를 아침에 챙기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신입사원 처지에 운 좋게 얻어걸린 평일날의 조퇴 덕분인지 동생의 목소리는 밝았다. 


"누나, 공부하는 데 미안해. 내가 스터디하는 데로 올라갈 테니 누나는 그냥 문 앞에 나와있기만 하면 돼."


미안해하는 동생에게 나는 언덕길이라 힘드니 중간에서 만나자 하고 서둘러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당시 내가 임용스터디를 하던 도서관은 말 그대로 산기슭에 있었기에 내가 더 빨리 내려가서 언덕을 힘들게 올라와야 하는 동생의 노고를 좀 줄여주고 싶었다.  


그렇게 급하게 뛰쳐나가 황급히 도서관 앞에 펼쳐진 길에 발을 올리기가 무섭게 멀리 자그마한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수트를 깔끔하게 차려입고 구두까지 신은 낯선 모습의 청년이었다. 나와 청년의 거리가 가까워지니 그제야 그 청년이 동생인 것이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내려가서 동생에게 열쇠를 주고 싶었는데 늦고 만 것이다. 언덕을 올라오다 나를 발견한 동생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더니 오지 말라고 본인이 가겠다고 소리쳤다. 수트를 입고 환하게 웃으며 힘차게 손을 흔들던 내 동생. 오월의 오후였던 그날, 햇볕은 따사로웠고 내 동생의 미소는 눈부셨다. 


"너 힘든데 올라오지 마. 누나가 내려갈게."


그러나 우리는 피를 나눈 남매였다. 한 지점에서 멈춰 설 때까지 나는 내려갔고 그는 올라왔다.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다고 씩 웃는 수트차림의 동생의 모습이 왜 그렇게 멋있어 보였을까. 청바지에 티셔츠, 모자를 벗어난 낯설면서 낯익은 내 동생의 모습이 가슴속에 일렁임을 일으켰다. 익숙한 일렁임. 동생이 내 마음을 첫 번째로 일렁이게 했던 날이 바로 떠올랐다. 그가 머리를 빡빡 밀고 집에 들어왔던 군입대 전날이었다. 


"신입사원이 조퇴를 하다니. 오늘 완전 운이 좋다. 올라오느라고 힘들었을 텐데 얼른 가서 좀 쉬어. 맛있는 것도 시켜 먹고."

"누나, 도서관 엄청 가파르다. 조용해서 공부는 잘 되겠다. 고마워. 집에서 봐."


동생은 열쇠를 받고 다시 돌아 길을 내려갔고, 나는 뒤돌아 내려가는 동생의 모습을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오월의 초여름, 주위는 푸르렀을 테고 대기는 꽃향기가 감싸 안고 있었을 테지만 내가 기억하는 오월의 그날은 길 위에서 나를 향하던 내 동생의 미소뿐이다. 그 하루, 내 동생은 나의 오월이었다.  


내 앞에서 걸어오던 남자가 어느새 나를 지나쳐 지나간다. 나는 다시 무더운 한 밤의 길로 돌아왔다.  


그날의 그 길에서 우리가 그렇게 다시 만날 일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의 그 길 위에 우리가 놓아둔 미안함과 감사함 위에는 계속해서 누군가의 미안함과 감사함이 쌓일 것이고, 또다시 오월을 닮은 누군가의 젊은 미소가 아로새겨질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고 나와 동생이 그 길을 찾게 된다면 우리는 축적된 그 마음과 계절들로 충만함을 느낄 것이다. 그 길 위에서 나는 언제든 오월을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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