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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쁘다 Mar 09. 2016

비평 비판 크리틱

[깔라면 나부터]



 비평, 비판, 크리틱은 발전을 위한다는 행위로써 성장을 도모하는 탁월한 도구이다. 때때로 비판적 사고는 어떤 순간에 쉽게 빠지지 않고 냉철한 합리적 사고를 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우리는 이를 달리 객관적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 절대적 객관성이 존재할 것인가. 그 아무리 냉철하고 이성적 사고를 한다는 위대한 철학가나 과학자, 비평가, 예술가라도 그들 또한 그들의 주관적 관점에 의해 바라본 객관성은 아닐까.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창의성의 즐거움]에 소개된 매들린 앵글이라는 작가는 "아무것도 객관적으로 관찰될 수 없다.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그것을 변화시키고 그것에 의해 변화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라고 전했다. 이에 나는 적극 동의하는 바이다. 이성을 관장한다는 좌뇌는 감정에 의해 좌지우지된다고 하지 않던가. 과학적 설명을 제하고라도 사실 우리의 합리적 시각을 깊게 보노라면 필경 우리의 사적인 감정이 지배하고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꾸준히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하라며 날 선 시각을 부추긴다. 그것은 흡사 감정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남들은 예예할 때 아니오라 답할 수 있는 최고의 지성을 가진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대학이며 기업이며 사회 곳곳에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위한 훈련의 장이 만연해지고 있다. 너도나도 어떤 현상에 자신의 객관적인 비판과 비평(타고난 지성)을 알리기 위해 한마디 거든다. (그런 관점으로 나의 이러한 이야기도 충분히 주관적인 관점이라는 것을 밝힌다.)


 반면 나는 때때로 그런 날 선 시각과 함께 내뱉어지는 차가운 말들에 얼어붙어 버릴 때가 있다. 물론, 어떠한 현상의 반대적인 시각을 볼 수 있는 건 굉장한 행운이다. 그 덕분에 시야와 사고가 확장되니 말이다. 문제는 그 객관성을 담았다는 비판과 비평이 상대적이지 않고 어느 누구에게나 습관처럼 내뱉어지는 데 있다.


가령, 어린아이가 얼토당토않은 코끼리 그림을 해맑게 그려낼 때. 아이의 그림 발전을 위한다고 비평을 하게 된다면? 혹은 어떤 사람이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스스로 무언가를 고민하고 연구하여 만든 무엇을 그 사람의 성장을 위한다며 비평부터 하게 된다면?!

그 아이가 그 어떤 사람이 만약 당신이라면, 어떻겠는가.

각설하고 무언가에 대한 탁월한 비평을 위해서는 그것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충분한 고찰도 없이 생경한 누군가가 대뜸 건네는 비평은, 비평이 아니라 비난에 불과하지 않은가. 비평, 비판, 크리틱이라 함은 상대방의 온전한 이해와 받아들임, 고찰 그리고 곁에서 꾸준히 지켜봐주고 응원해준 자의 특권이라 할 수 있다.


 누군가의 비평, 비판이 비난이라는 불쾌가 그려진다면, 그는 당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았던가 자기 우월감에 빠져 말하는 행위라고 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같은 말을 듣더라도 상대에 따라 다르게 들리는 것은 위와 같은 의미가 숨겨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진짜 비평, 비판이 필요할 때는 따로 있다. 누군가 자만과 오만에 빠져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을 때이다. 그런 순간은 잠깐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 두고 지켜보았을 때 할 수 있는 행위이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발전시키고 성장시키고 싶다면 곁에서 꾸준히 지켜보면서 그를 받아들이고 이해해보자. 그럼에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면, 그런 그가 딜레마에 빠져 당신에게 조언을 구한다면, 그때 충분히 비평, 비판을 해주자. 그는 진흙탕에 빠진 자신을 구해준 당신을, 더구나 왜 빠졌는지 인지시켜준 당신을 영웅과 같은 모습으로 바라볼 것이다.



완전한 이해가 없는 비평, 비판은
비난에 불과할지니 자신의 사고와 언행을 먼저 비판해보는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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