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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쁘다 Mar 15. 2016

못난이 인형

[다시 태어나든가]


갓 태어난 나를 보고 깜짝 놀라 뒷걸음질했다는 엄마 친구의 말처럼 어릴적 나는 진짜 못난이었다. 먹으로 구륵한 듯 팔자로 처진 눈썹이며 누구에게 꼬집힌 것 같은 두 눈, 터지기 직전의 볼 살과 얼룩덜룩한 까만 피부, 울음이라도 지을라 치면 영락없는 어릴적 그 못난이 인형과 닮아있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외모가 딱히 달라지진 않았다. 하지만 못난 외모를 가진 컴플렉스덕인지 치장에 관심이 많은 고모와 함께 방을 쓴 덕인지 외모에 신경쓰며 나름 최대한 이리 꾸미고 저리 꾸미며 지냈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한창 아이참과 풀을 이용하여 쌍커풀을 만들어 다니기도 했다. 위로 찝은 눈이 한결 틔여보여 '외모 가꾸기'에 더 열을 올렸다. 어디 쌍커풀만이랴, 외모에 자신감이 더해진 나는 화장기술을 터득하여 급기야 속눈썹을 붙이고 다니기도 했다. 속눈썹은 아이참이나 풀이 없이도 내게 인형같은 눈을 만들어 주었기에 마치 날 때부터 내것인 마냥 장작 일년이 넘게 달고 다녔다.


 그런 내게 시련이 있었으니 속눈썹을 붙여주는 풀의 부작용으로 두 눈커풀이 빨갛게 부어올라 더이상 아이참이니 풀이니 속눈썹따위를 붙일 수가 없었다.  그때 나이 스무세살. 꽃다울 나이.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이제는 21세기에 맞춰 첨단 기술이 필요할 때였다. 그 전지전능하다는 의느님께서 새 눈커풀을 하사하여 주셨으니 나의 '외모 가꾸기'는 날개를 단 듯 활개를 펼쳤다. 패션 디자인과을 들어갔다는 사명감으로 잡지와 각종 쇼를 교과서 삼아 최대한 나의 체형에 맞게 스타일링을 하기도 했다. 이십 때의 나는 더이상 어린시절의 새까맣게 그을린 팔자 눈썹 못난이는 아니었다.


위로 아래로 많은 표면을 감싼 덕분에 그럴싸한 외모로 사회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고칠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아주 고질적인 음울한 얼굴 빛이 문제였다. 실제로 사람들에게 쉽게 보이는 것이 싫어 항상 무표정하며 차갑게 대했고 말은 짧았으며 매사 신경을 곤두세우곤 했다. 사람들은 내게  잘 다가오지 않았고, 나의 첫인상을 좋게 보지 않았다. 그 모든 건 나를 위한 방어였으나 아마 가시가 박힌 처절한 얼굴이었으리라.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위한다는 방어가 나를 더 해하는 기분이 들었다. 보기 좋은 울타리를 쳐두고 그 안에서 자조하며 사람과 나를 분리시켜 두는 행위는 온실 속에 방치해 두기만하는 선인장처럼 어리석었다. 그렇게 나는 나의 표면 가꾸기에만 여념이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정작 내면을 돌볼 틈이 아니 돌볼 줄을 몰랐다. 삶이 피폐하다는 말처럼 나는 점점 말라 비틀어져갔다. 몹시 허기가지고 목이 말랐으나 그런 나를 어떻게 달래고 위하고 보듬아 주어야 할지 몰랐다. 하루가 주어졌기에 사는 어떤 이처럼 삶에 떠밀려 그저 하루를 떼우듯 살았다. 어릴 적 못난이는 내면 깊이까지 못난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내면의 딱지들을 떼어낸 건 사실 얼마되지 않았다. 또한 그 딱지들을 새하얗게 떼어낸 것도 아니다. 다만 내게 딱지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들여다보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꽤 많은 딱지가 들러붙어 있음을 알고 하나 하나 벗겨내어보니 그 벗기는 재미가 꽤 쏠쏠했다. 간혹 뜯기는 아픔을 느낄 때면 상처 받은 그 기억에 미치도록 울어보기도 술을 퍼 마시기도 했다. 그렇게 새살이 돋은 곳에 또 다른 상처가 생기고 딱지가 지더라. 그게 삶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딱지는 그저 딱지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나를, 상황을 받아들이고 나니 메마르기만 한 내면에 따스한 빛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빛이 스며들더니 넉넉함이 생기고 웃음이 나면서 입꼬리가 올라섰다. 나를 받아들이고 나서야 누군가를 받아들일 공간이 생겨났다. 최근에 들어서야 비로소 "얼굴 빛이 살아난다" "얼굴이 보기 좋다" "웃는 상이다" "얼굴이 점점 좋아진다"라는 진정어린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아마도 그 이야기는 내 얼굴에 스민, 웃음을 머금은 따스한 빛 덕분일 가능성이 크다.  


 그 빛은 사실 여전히 창가에 놓인 촛불처럼 위태롭기만 하다. 하지만 그렇게 꺼지면 또 어떠리. 다시 빛을 밝힐 또 다른 나를 찾으면 될 것을...


 외면 보다 내면이 중요하다는 뻔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우리에게 두 눈이 존재하는 한 외적인 것, 겉으로 드러난 것을 무시하며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세상은 적당히 포장을 해주어야 하기도 하다. 다만, 그 안에 담겨진 것도 포장한 것과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면 우리는 한층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러기에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관리를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외모에만 집착하며 성공에 목 마른 지식만 집어 넣을 것이 아니라 나를 성찰할 수 있는 공부도 시작해야 한다. 다이어트를 하듯이, 화장법을 배우듯이, 외모를 가꾸듯이 우리의 내면도 잘 가꿔줘야 한다. 그런다고 늘 좋은 날이 온다는 보장은 없다. 그럼에도 나의 내면을 밝힐 자그만한 불씨 하나만이라도 보살필 수 있는 내가 되기를. 너가 되기를 그래서 괜찮은 어른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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