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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쁘다 Nov 06. 2019

초록초록한 이슬 한 방울

[때 이른 육퇴의 달콤함]


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었다.

없는 돈에 작은 스튜디오를 꾸려 창작소을 열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가끔 그림을 그리고 때가 되면 여행을 다니고 주말이 되면 혼자 시간을 보내며 생각들을 적어두기도 하던 할 일이 많은 사람이었다.

내 한 몸만 간수하면 되지. 란 생각에 제 멋에 살던 시절이었다. 공감능력은 떨어졌고 자만심만 높았더랬다.


오늘 사랑스런 내 아가는 낮잠을 퉁치고는 오후 내내 간헐적 짜증을 분출했다. 잘 웃다가도 떼를 쓰고 잘 놀다가도 짜증을 내고 신나 하다가도 씅을 냈다. 이렇게 감정 기복이 심할 수가 있을까...

저녁으로 준 김밥을 한 입 베어 물고 던지고 한 입 베어 물고 던져대는 통에 머리끝까지 울화가 치밀었던 나는 사방에 뿌려진 밥풀을 하나하나 주어 담으면서 내가 지금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지... 란 생각에 두통이 몰려왔다.

상황 판단이 되지 않는 (사랑스런) 내 아가는 밥풀이 무성한 곳에 엉덩이를 비집고 앉아 발바닥을 비비적 대고 있었다. 이미 방전 댈 대로 방전이 된 나는 참고 있던 인내심이 폭발해 야아! 하고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이전에 침대에서 기저귀를 갈다 침대에 쉬를 한차례(생후 처음 일어난 일) 하고 난 후였다. 엄마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본 아가의 눈빛은 슬펐고 나는 또 금세 후회하고 미안했다.

“엄마가 오늘은 너무 힘들어.. 우리 얼른 들어가 자자..” 그러곤 아기를 안고 방으로 들어가면서 엄마가 소리 질러서 미안해 미안해했다.


무언가 기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그럼에도 사랑스런) 내 아가는 침대에 앉아 눕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발이 시린 건지 아픈 건지 발을 주물러 달라며 끝내 눕지는 않고 5분도 안 되어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아댔다. 불과 몇 분 전 분노 게이지가 폭발했던 나는 아기가 고집스럽게 꾸벅꾸벅 조는 모습에 빵 터져버렸다. 이 요망한 아기가 오늘도 엄마를 들었다 놨다 하네.


여전히 하고 싶은 것이 많다. 하지만 여느 엄마가 그렇듯 하루 종일 집안에 필요한 일을 하다 보면 12시간 노동은 하고 싶은 일을 할 틈을 주지 않는다.  

제 멋에 살지 못한지는 오래되었다. 내 옷 한 벌보다 당장 내 아이의 내복 한 벌이 더 중요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반면 극심하게 자기중심적인 천상천하 유아독존 최상급인 아기를 케어하다 보니 공감 능력이 날로 치솟는 중이다. 삶은 이렇듯 전체로 볼 땐 정말 공평하다. 오후 내 힘들었지만 그 고행을 잘 견디어 내면 이른 육퇴란 달콤한 보상이 온다. 가만 보면 어느 하나 치우친 게 없다.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고,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게 인생사인가 보다.


맥주만 마시던 내가 오늘은 초록초록한 이슬 한 잔. 아니 여러 잔을 했다. 캬. 이렇게나 달콤한 이슬이었다니... 몇 잔에 얼큰하니 에너지가 달아오른다니

기부니가 좋쿠나~ 육퇴 후 이슬을 마셔대던 친구의 마음을 급격하게 공감하게 된 이 밤이 너무나 달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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