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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영 Aug 13. 2017

#07. 우엉볶음, 초원의 빛


“할아버지, 주스 드세요”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부터 우리 가족은 외가와 살았다. 외할아버지는 원고지가 널브러진 좌식 책상 앞에 누워 계셨는데, ‘안 써지는 글’이란 놈과 한바탕 씨름 끝에 들배지기로 내팽개쳐진 것 같았다. 나를 보시곤 다리를 겹쳐 꼬고 배에 힘을 주어 반동의 힘으로 몇 번 앉으려다 말고, 잘 마시겠다시며 그대로 누워 계셨다.


외할아버지는 집에서 읽고 쓰는 시간이 많았다. 각종 강연, 발표를 위한 준비였다. 며칠 동안 원고지와 함께 흐트러져 있다가 한 번씩 깔끔하게 양복을 차려 입고 나서곤 하셨다. 강연 내용은 주로 독립운동에 관한 것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일본 식민통치기 조선의 지식인이었다. 일본 주오대학 재학 중에 학도병이라는 명목으로 강제 징집 명령을 받았다. 일본군과 함께 중국으로 출발하기 전에 외할머니께 ‘원수의 편에서 싸울 수는 없으니, 탈출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단다. 편지가 끊기고 은근한 감시가 느껴지자 외할머니는 뭔가 일이 벌어졌음을 짐작했다. 외할아버지는 신병 훈련 후 작전 지역에 투입되자, 동지 몇 명과 함께 탈출했다. 당시에 임시정부가 있던 중경으로 향하던 중에 광복군이 창설이 돼 그곳에서 글과 선무공작으로 독립운동을 독려하는 책임을 주로 맡았다. 해방 후 일 년쯤 지난 어느 새벽녘에야 고향 집에 도착했다.


원고를 든 외할아버지가 외출하고 외할머니마저 자리를 비우시면 두 분의 방에 몰래 들어가곤 했다. 허브 캔디부터 몇 개 꺼내 먹었다. 어린애 입맛에 맞지 않았는데도 먹기 조심스럽다는 이유 때문에 집착했다. 외할아버지는 이따금 호박색 사탕을 나눠주시며, 누가 오래 먹는지 내기를 걸었다. 금세 깨물어 먹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책상 서랍도 열어봤다. 외할아버지의 메모들은 읽기 힘든 한자 투성이어서 훔쳐보는 재미가 없었다. 가지런히 놓인 문방구들을 돋보기로 이리저리 확대해 봤다. 옷장도 열어 봤다. 나중에 외할아버지의 카키색 점퍼를 물려받아 입었을 만큼 관심 가는 색깔의 옷이 몇 벌 있었다. 일 년에 몇 번 뵙는 것과 ‘함께 사는 것’은 달랐다. 낯설고 조심스러운 마음을 풀어내고 싶어서였는지, 새로운 가족을 맞이한 강아지처럼 외할아버지 방구석구석을 킁킁거렸다.


그런데 함께 생활을 해보니 이야기 속의 독립운동가와 외할아버지를 매치하기가 쉽지 않았다. 정말 일본군과 중국군의 총알을 피하며 탈출하기는 했는지 외할아버지는 매사에 느릿느릿했다. 외할머니가 큰 소리를 내야 움직였다. 반대로 외할머니께 잔소리하시는 현장을 보고 있자면, 중국 대륙을 가로지르는 스케일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따금 외삼촌들이 찾아와 원망 섞인 소리를 할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땐 별말씀 안 하고 듣고만 계셨다. 내가 나서서 원래는 언변이 좋으신 분이라고 외삼촌들에게 알려줘야 할 것 같았다. 대신 외할아버지가 자신의 손님들과 함께 있을 때는 확실히 달라 보였다. 다과를 들고 방에 들어가 보면, 손님들이 외할아버지께 보이는 처신이 조심스럽고, 대화 내용도 지적이게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두 분이 여느 조부모님과 다르다고 느꼈던 부분은 따로 있다. 우리 집은 소위 밥상머리 교육을 통한 예의범절 교육이 철저했다. 진지 잡수시라고 모시고, 어른들 수저 드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식사를 시작하고, 밥은 그릇 한쪽에서부터 깨끗하게 먹어야 하는 등 몇 가지는 아예 몸에 배어있다. 부지런한 외할머니 덕분에 주말마다 집안 청소하고, 밖에서 놀던 중에도 참기름 바르고 소금을 솔솔 뿌리는 김 재우는 일에 불려 오기도 했다. 김을 제일 많이 먹는 업보로 ‘부당노동’이라고 푸념할 수도 없었다. 손주들의 갖은 투정과 애교를 웃으면서 받아주는 TV 속의 할머니 할아버지를 볼 때마다, 우리 집 어른들은 참 다르다고 생각하면서 두 분을 가만히 쳐다보기도 했다.  


처음의 낯섦도 시간이 지나면서 사그라졌다. 학년이 올라가고 세상에 궁금한 것이 많아지면서 ‘밖에서는 특별하고 집에서는 평범한’ 외할아버지를 더 이상 탐구하지 않았다. 내가 고등학교 3년생이 될 즈음에 외할아버지께서 이사하시면서 함께 하던 살림이 나뉘었다.



“우엉볶음을 제일 좋아하시지”

서울에서 수원 가는 길이 왜 그렇게 멀게 느껴지던지, 큰 마음먹고 외할아버지를 찾아뵙기로 했다. 웬일로 내가 반찬을 준비해 가겠다고 나섰다. 외할아버지께서 우엉볶음을 좋아하신다는 정보를 듣고, 흙이 잔뜩 묻은 길쭉한 우엉 몇 대를 샀다. 신나게 흙장난하고 들어온 아이를 씻기듯이 개수대에 우엉을 던져 넣고 물을 틀었다. 흙물이 시원하게 흘렀다. 우엉 한대를 골라잡으니 활어처럼 건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때를 밀듯 스으스윽 껍질을 벗기니, 오랫동안 땅속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을 굵고 단단한 뿌리가 뽀얀 속살을 드러냈다. 둥근 뿌리를 채 써는 일이 조심스러웠지만, 어렸을 때 외할머니께 배웠던 단순노동의 즐거움이 생각났다. 프라이팬에 다듬은 뿌리 조각들을 후드득 쏟아 넣고 기름에 볶다가 간장과 물엿으로 색을 냈다. 기껏 닦고 다듬었지만, 우엉은 저의 처음 모습과 같은 갈색을 띠고 달큼한 흙냄새를 풍겼다. 불 위에 오래 올려 두었는데도 오독오독했다. 우엉이 지닌 어른스러운 씁쓸한 맛과 귀여운 단맛, 짠맛이 조화로웠다. 외할아버지께 직접 만들어 드리는 첫 반찬이 맛있게 완성됐다.



“이건 몇 살 때예요? 이건 누구예요?”

우엉볶음에 대한 보답이라도 받아내려는 듯, 흑백 사진첩을 들고 부산스럽게 굴었다. “요거 보통학교 소풍 갔을 때 찍은 거지”, "이때 일본 유학 간다고 모두 기차역에 나와서 환송해줬어.", "가장 친했던 중국군 소장. 사진 뒤에 이 글이 그 사람이 써준 거지", "이건 네 할머니와 화신 백화점에서…"

 

사진첩을 보고 있으니, 예전에 스킨스쿠버 했을 때가 생각났다. 깊고 검은 바닷속으로 들어가니, 또 다른 세상이 나타났다. 그곳에도 하늘과 땅이 있었다. 수초를 만져보려고 바닥까지 내려가서 서 봤다. 내 눈높이에서 나는 안중에 없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물고기 떼를 보고 있으니, 존재하고 있었지만, 전혀 알지 못했던 세계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흑백 사진첩을 넘기면서 외할아버지의 시간을 파노라마처럼 볼 수 있었다.


사진 속의 까까머리 어린이가, 공부 잘하게 생긴 고등학생이, 세련된 ‘모던보이’ 일본 유학생이 모두 외할아버지라니! 옆에 앉은 분이 맞는지 번갈아 봤다. 지역신문에 실린 신식 결혼식을 치른 새신랑, 여섯 살쯤 되는 엄마를 포함한 다섯 아이들을 마루에 앉혀 놓고 미소 지었을 아버지, 말을 타고 어딘가를 응시하는 남자,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저분이 모두 내가 본 적 없는 외할아버지였다. 무엇보다 전장에 있었을 때가 스무서넛, 어린 나이였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그래서 외할아버지가 궁금해졌다. 요즘은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가장 슬프고, 행복했던 기억이 무엇인지, 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등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다. 사진첩을 덮고, 물속에서 참던 숨을 뱉는 것처럼 큰 숨을 내쉬었다.

 


“얘가 왜 여기 있니? 학교 안 가고?”

"아이구 얘가 벌써 졸업하고, 회사 다니잖아요.” 어쩔 줄 모르는 나 대신에 엄마가 외할아버지 귀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얘가? 얘가 대학생인데…” 하고 나를 보며 슬근 웃으셨다. 나와 눈을 맞추고 있었으나, 외할아버지는 오래전에 없어진 당신 고향 집에 가 계신 듯했다. ‘대학생인 내가 좋으셨던 걸까?’ 대학 졸업식 때 오셨던 모습을 떠올리고 있을 때, 간병인이 들어왔다. 외할아버지 모르게 사이다에 수면제 두 알을 넣고 마시라고 권했다. 단물을 꿀꺽꿀꺽 삼키던 외할아버지가 갑자기 입에서 알약을 발라내더니 간병인에게 매섭게 던졌다. 그리고 일본말로 화를 내셨다. 분이 풀리지 않는지 허공에 팔을 거세게 휘저으셨다. 그렇게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 봤다. 지금 외할아버지는 어떤 기억과 마주하고 계신 걸까? 분노와 공포가 그를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와 웃으며 많은 곡기를 함께 했던, ‘네 엄마에게 잘 해라’ 다정하게 말하던, 옛이야기를 재미나게 해주시던 분의 깊은 곳 어딘가에 가늠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니, 어리둥절했다. 외할아버지는 한바탕 소란 후에 다시 누우셨다. 내일 어디라도 가실 것처럼 TV에서 나오는 날씨 예보를 꼼꼼히 보고 계셨다. 다친 사슴처럼 힘없이 누워 계신 외할아버지를 두고 일어났다. “저 갈게요. 다음에 다시 뵈러 올 때는 건강해져 계세요…”



8년이 지났네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당황했는지 몰라요. 여든여덟의 노인이 몇 개월간 병상에 계셨는데도, 다른 생각을 못하고 다시 건강해지실 거라고 믿고 있었던가봐요. 할아버지께 궁금한 것이 있어도 이제 여쭈어보지 못한다는 상실감도 컸어요.


정리해두신 자서전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처음 주셨을 때는 한자 어투가 쉽게 읽히지도 않고 이미 아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제대로 안읽었어요. 하지만 병을 앓고 나서야 건강을 아끼는 것처럼 할아버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책뿐이다 보니, 구절마다 음미하게 됐어요. 그제야 ‘나라를 위해 싸운 위인’ 보다 ‘보통 청년으로서의 할아버지’가 읽혔어요.


탈출할 때 할아버지가 다른 동지들을 이끌었다는 대목에서도, 처음에는 ‘맨날 밥도 늦게 드시는 분인데 젊었을 땐 정말 빨랐나 보다, 근데 되게 용감하셨네’ 하는 엉뚱한 생각이나 했었죠. 이제는 선두로 뛰고 있던 할아버지가 경황이 없어서 방향을 잘못 잡는 바람에 헤맸다는 고백, 신발도 채 못 신고 들고 나온 동지를 걱정하는 마음, 며칠 전에 일본군 칼에 죽은, 할아버지가 통역을 했던 중국인이 묻힌 자리를 지나고 있다고 쓰여 있는 부분이 피부에 스며드는 것 같았어요.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를 보면, 모두들 ‘나는 두렵지 않다.’고 해요. 그런데 그런 표현 때문에 그분들을 이해하는 기회를 놓치는 것 아닌가 싶어요. 사실은 ‘나도 너무 두렵습니다. 그런데 꼭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였을 거라고 생각해봐요. 두려움은 제가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니까요. 그제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옳은 일을 위해 죽음도 기꺼이 선택하는 모습이 특별하게 다가와요.


함께 살면서 본 할아버지는 늘 느긋하고 다소 쑥스러움이 많은 분이셨어요, 거기다 언젠가 들었던 죽기가 두렵다는 솔직한 고백을 더해보면, 할아버지가 그 모든 공포, 추위와 더위, 피곤과 막막함을 스스로 선택하고, 이겨내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면에서 할아버지가 우엉을 좋아하셨다는 것은 잘 어울리는 일이에요.


‘우엉은 병이 거의 없고 추위에도 매우 강하며 토질을 별로 가리지 않는다.’ – 지식백과 -


그 땅이 아무리 척박해도, 강건한 기개로 흙을 비집고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는 우엉이야말로 할아버지와 동지들을 닮았어요. 국권이 없는 조선, 전쟁의 근원인 일본, 그리고 휩쓸려 도착한 중국. 어느 곳이든 편할 수 없는 땅이었겠지만, 터를 가리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하셨으니까요.


“생각건대 어떠한 사유였던 한번 시대의 조류에 밀려나서 희생이 된 사람은 다시 원형대로 무사히 회기 하기란 지극히 힘들다는 사실을 되씹어보게 하였다.”  - 황갑수 -


할아버지는 이렇게 책을 마무리하셨어요. 병상에서 거칠게 약을 뿌리치며 소리치시던 낯선 모습이 떠올랐어요. 무의식 중에 보인 할아버지의 속내를 보면서, 우리가 알 수 없는 두렵고 안타까운 기억을 평생 혼자 되새김하며 살았던 것은 아닐까? 그런데도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살아오신 것일까? 생각해보게 됐어요. 그리고 그 또한 그 시대를 겪어낸 청춘으로서 대견한 일이고, 우리들의 아버지로서 감사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해마다 이맘때쯤 되면 할아버지가 더 많이 생각나요.

하지만 이제 궁금해도 여쭈어볼 수가 없으니,

대신 할아버지께서 가장 좋아하시던 시를 읽어요.

반복해서 읽으면 할아버지가 답을 해주시는 것 같을 때도 있거든요.


한때 그리도 빛나던 영광이
내 앞에서 영원히 스러졌어라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다시 그 시간이 되돌아오지 않더라도

차라리 그 속 깊이 간직한

오묘한 빛을 찾으리

- 윌리엄 워즈워드, 초원의 빛 중 -


 언제나 초원의 빛으로 기억될 할아버지께 외손녀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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