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부슬거리는 초여름이었다. 점심때가 지난 쌀국수 가게가 한산했다. 쌀국수에 월남쌈 말이 2개가 딸린 정갈한 세트 옆에 고수 더미가 속없이 싱글거렸다. “오늘 점심 좀 늦게 먹을 수 있어요? 사무실에 있다가 우리 다녀온 후에 식사 가면 좋겠는데. 혼자 둬서 미안해요~” “그럼요!!” 제일 어린, 여직원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보다 나이 많은, 남자 후배 직원은 ‘우리’에 포함되어 멋쩍게 따라 나갔다. “췟!” 마녀가 수프에 독초를 넣듯이 이죽거리며, '설마 고수에 치사량이 있는 건 아니겠지?'하고 걱정할 만큼 많이 나온 고수 전부를 쌀국수에 욱여넣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천천히, 그릇을 싹 비워냈다. 그렇게 처음으로 ‘혼자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요즘 '혼밥'이라고 부르는, 혼자 하는 식사는 매우 불편하고 어색한 일이었다. 밥 짝이 없을 때는 차라리 굶었다. 기력이 딸려서 어쩔 수 없이 우유나 빵으로 허기를 때울 때조차 뭐라도 읽는 척하느라 바빴다.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 하나 사 먹다가 트레이에 얹힌 신메뉴 광고지를 외울뻔한 적도 있다. 그런데 처음으로 홀로 식사를 떼던 날, 꾸욱 박혀 있던 불편함이 일순간 사라졌다. '여기, 오롯이 나만' 있다는 것이 되려 홀가분하고 좋았다. '뭐 하느라 밥도 못 먹고 다녀...', '꼭꼭 씹어서 다 먹어.' 나 자신에게 처음으로 이런 말을 건네는 생경한 기분을 소화하는데 몰두했다. 마음에 살금거리는 억울함, 지치는 마음을 꼭꼭 씹어서 넘기느라 (원래부터 나에게 아무 관심도 없었을) 다른 사람들이 안중에 없었다.
처음이 어렵지, 이제는 혼자 식사 하는 것이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반가울 때가 있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밥 먹는 나’로만 있는 한산함이 필요할 때다. 온전히 멍을 잡는, 배는 든든하고 머리는 맑아지는 무아지경의 밥 먹기이다. 어떤 때는 북적이는 식당에 혼자 앉아서 사람들 구경도 한다. ‘다른 사람들은 뭘 먹나’, ‘옆 테이블은 왜 저렇게 많이 남겼데, 아깝게.’ ‘저긴 분명히 소개팅, 여자가 낫네.’ 시답지 않은 생각들이지만 밥 짝을 대신할 만큼 흥미롭다. 매번 먹는 장소, 모양은 달라도 혼자 먹는 식사의 메뉴는 정해져 있다. 지금껏 쌀국수 아니면 백숙이었다. 둘 중에 단연코 쌀국수가 압도적이다. 세상에 눈 뜨자마자 보는 첫 번째 것을 제 어미로 아는 거위 마냥, 혼밥의 첫 주인공이 쌀국수여서인지는 모르겠다. 주말 근무를 시작하기 전에 땀을 내며 한 그릇, 쉬는 날 신나게 광화문, 시청, 명동 일대를 쏘다니다가 한 그릇, 곡기를 놓친 귀가 길에 한 그릇. 겨울이나 비 오는 날은 더 알맞지만, 더운 날도 상관없다. 큼큼하고 노릿한 고깃 국물과 안심-등심-양지-차돌박이 중에 (실은 큰 차이를 몰라서) 뭐라도 상관없는 고기가 올라간, 쫄깃하고 탱탱하고 투명한 쌀면이 똬리를 튼, 쌀국수 한 그릇을 혼자 오랫동안 먹는다.
“야! 1개월만! 그거면 되지.” “1개월은 무슨, 1주일만!” “…” “…” “…” “…”
아직 대학생 티가 폴폴 풍기는 신입사원들의 해장. 어제 밤의 발랄함을 후회하며, 식탁에 팔을 괴고 무너지는 상채를 끌어올리던 스물셋에서 스물다섯을 넘지 않은 남자 둘, 여자 셋이었다. ‘1주일만…’ 그것도 침을 꼴깍이며 얻을 시간, 이제 두 달짜리 방학 같은 건 없다는 것을 깨닫던 날이 아주 선명하게 기억난다. 쌀국수집의 자리를 사수하기 위해 조금 일찍 나섰었다. 볕은 노곤했고, 우리는 히죽거리며 몰래몰래 흐느적거렸다. 순한 강아지같이 앉았다가 쌀국수가 나오자 기다렸던 주인을 만난 것처럼 일제히 달겨들었다. 평소 같으면 해선장, 칠리소스를 1:3으로 넣어 국물 간을 맞추었을 텐데, 이번에는 그만두었다. 다 귀찮았다. '소스 안넣은 쌀국수 국물이 느끼했던가? 맹맹했던가? 아니면, 좀 특이한 향이 있었나?' 애초에 소스가 필요했던 이유를 더듬거리고 있었지만 답을 찾기까지 기다릴 여유도 없었다. 국물을 한 술 떴다. 그리고 몇 번 더 호로록거렸다. 뜨거운 국물이 목을 타고 명치까지 내려가자 울렁거리던 속이 잠잠해졌다. 어렸을 때, 배탈 났다고 끙끙거리며 드러누워 있으면 배 위에서 시계방향으로 훠이훠이 원을 그리던 뜨거운 엄마의 손 같았다. 장풍을 쏘는 건지, 엄마들 손에서는 원적외선이 나오는 것인지 잠이 들었다 일어나면 다 나아 있었다. 국물만으로도 속이 풀렸다. 달큼하고 맵큼하던 소스 맛이 잔망스럽게 생각되고, 이제야 참 맛을 찾은 것 같았다.
그 후로 쌀국수 국물에 검고, 빨간 소스를 뿌리지 않는다. 분명히 함흥냉면에서 평양냉면으로 갈아타던 때가 있었을 텐데, 생각이 나질 않는다. 아메리카노에 시럽 펌프질을 멈추던 때도, 무슨 변덕이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쌀국수는 다르다. 그게 하필 일 년에 다 쓰지도 못하는 열댓 날(공휴일 빼고)만이 직장인에게 주어지는 ‘쉬는 날’이라는 것을 소름 끼치게 알게 된 날이어서 인지는 모르겠다. 직장생활 처음 한동안은 휴가를 내면, 석사 공부하는 친구들이 남아 있는 학교에 갔다. 친구들은 몇 개월간 항해를 하고 돌아온 뱃사람이 바닷 이야기를 풀어내듯 회사생활(주로 뒷담화)에 대해 조잘거리는 내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어줬다. 그런데, 교정을 둘러보니 연간 네 달쯤 되는 방학을 가진 학생들이 고작 열 댓날 휴가밖에 없는 직장을 갖기 위해 학창 시절 내내 애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석사 공부하던 친구들도 졸업을 하고 직장을 가졌다. 학교는 낯설어지고 회사가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방학 따위 없는 것 이상으로 많은 것들을 시험하고 실험하며, 선배, 동료, 후배들과 소스 없이, 레몬즙과 양파와 숙주와 매운 고추와 (안 먹는 사람들 것 까지 걷어 모은) 고수로만 맛을 낸 담백한 국물의 쌀국수를 많이도 먹었다.
두 달 남짓한 시간 동안 그저 해 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주말, 크리스마스, 새 해니 하는 것도 없었다. 하루가 아침 10시, 오후 12시 30분, 그리고 오후 4시, 저녁 8시, 잠시 후에 밤 11시, 그리고 새벽 3시, 이런 식으로 훅훅 흘렀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접질은 발목을 검사받을 시간도, 동료들의 인사와 응원에 눈길을 둘 짬도, 살갑게 챙겨준 도시락, 간식 등을 입에 넣을 틈도 없었다. 헐떡이면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던 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한 숨 돌리며 도시락 대신 사무실 밖에서 먹은 첫 저녁 메뉴도 쌀국수였다. 친구와 함께 쌀국수에 월남쌈과 맥주를 시켜 푸짐하게 먹고 있는데, 회사에서 그동안 무사히 버티고 지금까지 잘 해왔다는 격려의 문자를 받았다. 그래서 마음이 놓였는지, 두통이 오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아침에, 어떤 날은 저녁에, 어떤 날은 일어나기도 힘들었다. 열이 있다 말았다 했다. 콧구멍 깊숙이 면봉을 넣는 수모를 겪으며 독감 검사도 했지만 그마저도 아니었다. 원인 불명의 두통, 그것을 다스릴 진통제를 찾을 시간이 필요했다. 멈춰야 할 때를 알려주는 돌직구 몸뚱이에게 미안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덕분에 병가를 냈다.
떠나는 회사, 앞으로 갈 회사를 배려하며, 이직을 할 때도 가져보지 못했던 시간, 가지고 있는 휴가를 다 붙여도 만들어 보지 못할 시간, 직장인으로서 처음 가져보는 한 달이었다. 하지만 병가는 쉬는 휴가와 달랐다. 검사를 받고, 결과를 기다리고, 다른 검사를 예약을 하는 일들로 분주했다. 9년 동안 즐겁게 다니던 회사에 돌아가지 않기로 결론을 냈다. 잠시 동안 백수가 되어보자 했지만 다른 선택을 했다. 새로운 회사에 가기 전에 다른 한 달을 얻었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 포르투갈을 거쳐 집에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애석하게도 나의 한 달에는 기대했던 깨달음, 편안함, 새로운 의지 같은 건 없었다. 순례길에서도 반복적인 발걸음에 따라 짧은 생각들이 무한대로 맴돌 뿐 결론이 나지 않았다. 내가 얻은 것이라곤, 고작 ‘심지어 휴가도 참 힘들다’는 것이었다. ‘이제 곧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갈 텐데, 이렇게 돌아가서 어쩌지?’ 파리에서는 입맛이 없었다. 미식의 나라에 있다는 사실이 남의 이야기 같이 시큰둥했다. 마트에서 샐러드와 과일이나 사서 우적거릴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전 엄마가 파리에 계셨을 때 쌀국수를 맛있게 드셨다는 것이 생각났다. 검색을 하니 파리에 좋은 쌀국수 집이 꽤 많았다. 베트남이 프랑스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베트남인들이 운영하는 가게가 여러 곳이고, 가격도 저렴한데다 인기가 많다는 것이었다. 숙소 가까이 있다는 맛집을 시작으로, 이동 동선에서 검색해 둔 식당이 포착되면 놓치지 않았다. 봄비가 멈추지 않는 파리의 길 위에서 찾아 먹는 쌀국수보다 더 좋은 메뉴는 없었다. 뜨끈한 국물에 푸짐한 고기 인심! 파리 맛집 리스트에 올라온 파스타나 샌드위치, 스테이크에서는 절대 느끼지 못할 편안함이 목구멍으로 술술 넘어갔다.
19세기 초 베트남에 소개된 프랑스의 요리 ‘뽀오페’가 베트남의 식재료에 맞게끔 변형되었다는 설로서 pho(베트남 쌀국수)의 국물을 만들 때 사용되는 구운 양파와 생강이 뽀오페를 만들 때 사용되는 것과 동일하며, 베트남 이외의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 이러한 조리방법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도 이 설을 지지한다. 베트남 농경사회에서는 노동력을 중요하게 생각해 소를 신성시하였기 때문에 식용하는 일도 드물었다. 이 같은 사실은 베트남에서 프랑스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pho가 만들어졌다는 설을 뒷받침 한다.
-네이버캐스트 푸드스토리 중-
즉, 베트남 쌀국수는 자신들의 삶에 들이닥친 나라, 프랑스의 국물에 가장 베트남스러운 식재료인 쌀면을 넣어 만든 음식이었다. 베트남 역사는 깊게 알지 못해도, 누구도 프랑스식이라고 부르지 않는, 어엿한 ‘베트남식 쌀국수’를 만들어냄으로써 그들이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아냈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한식으로 치면, 부대찌개에 견줄 탄생비화를 가진 베트남 쌀국수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따금 절실히 쌀국수를 찾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성실하고 당당하게 살아낸 사람들의 기운이 담긴 음식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파리에서의 쌀국수도 그랬다. 아무것도 해결한 것 없이 보낸 한 달이라며, 힘이 빠져 있던 나에게 입맛을 찾아주었다. 내 일정을 맞추려면 순례길을 하루에 19km ~ 29km 정도씩 걸어야 했다. 그런데 숙소에 도착하기 전 2~3km 지점이 늘 고비였다. 잘 걷다가도 그쯤에서는 고집 센 황소처럼 굴면서 주저앉았다. 하지만 그때 일어나서 걷는 한 걸음이 또 다른 한 걸음을 만들고, 그 발이 다른 한 발을 끌어냈다. 그리고 그 끝은 늘 뿌듯한 도착으로 마무리되었다. 어디서 잘 지, 뭘 먹을지, 어떻게 해야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을지 궁리하는 것이 여행의 전부가 되고 있는 것 같아서 불편했었는데, 그것은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매일 목적지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었다. 날씨, 길의 모양, 그날의 컨디션에 나를 던져 놓고, 그저 차곡차곡 걷는, 그 자체로 건강하고 감동적인 한 달이었다는 것을 여행이 끝나고도 조금 더 후에나 알게 됐다.
살면서 입맛을 잃게 되는 순간이 있다. 소소하게 실망하는 일들부터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까지, 사는 게 멈추어 버릴 때가 있다. 그런데 그런 게 쨍그랑거리며 깨지는 순간이 바로 밥술을 뜰 때다. 방금 전까지 삶의 고단함과 배신감에 괴로워하던 내가 숟가락을 꼭 쥐고 밥상 앞에 앉아 식욕을 느끼고 있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다. 선뜻 무안한 기분이 들면서도 마음이 놓이는 때다. 먹을 것을 입에 넣고 씹고 목구멍으로 넘기는 동안, 살면서 처음 느낀 맛, 할 수 있다면 뱉어 내고 싶은 맛을 삼키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맛을 온 육신에 새긴 나, 즉 그 밥을 먹기 전과 후의 나는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느끼게 된다. 황동규 시인이 시 ‘삶의 맛’에서 말했다.
체온 38도 5분 언저리에서 식욕을 잃고 (중략)
세상 마지막 날에
제일로 잊지 말고 골라잡고 갈 삶의 맛은
무병 맛이 아니라
앓다가 낫는 맛
앓지 않고 낫는 병이 혹
이 세상 어디엔가 계시더라도
또 배우 김혜자가 디어 마이 프렌즈에 대한 인터뷰에서 그랬다.
최근작 중 단연 이 드라마가 최고다. 한없이 인생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다. 인생에서 버릴 토막은 없구나 새삼 느끼고 있다.
원래 삶이라는 것이 맛있기만 하지는 않았던 것인가 보다. 그 누구도 맛있는 것만 먹고 살지도 않는가 보다. 골고루 먹어야 건강한 것처럼, 쓰고 아린 맛도 꼭꼭 씹어 먹어야 비로소 균형 잡힌 삶의 맛을 알 수 있다고 먼저 살아보신 분들이 하시는 말씀이 이제야 조금씩 귀에 걸린다.
그래서 나도
앞으로 맞이하게 될
작게, 크게 식욕을 잃게 된 어떤 날에
처음 혼자 밥을 먹게 해주었던,
직장인의 숙명을 받아들이게 했던,
먼 길 떠났던 마음을 다시 불러들였던,
쌀국수를 먹으며 꾸준히 괜찮아지면 된다고 생각하고 안심한다.
허기 없이 간절한 식욕이 혹
이 세상 어디엔가 계시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