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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영 Mar 04. 2016

#05. 낙지볶음, 남매지간

“여자!”

세 돌이 된 내가 동생을 갖게 된다는데, 여자가 좋겠냐, 남자가 좋겠냐는 질문이었다. 여자 인형과 남자 인형 중 뭐가 더 예쁠까 생각하다가 ‘인형은 자고로 머리가 긴 여자’라며 내놓은 답이었다. 엄마가 옆에 누워서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낮잠을 잤다. 노란 장판에  꽃무늬, 엄마의 큰 배, 깔깔거리던 소리. 이것이 공식적인 내 인생 첫 기억이다. 즉,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동생'에 대한 것이다.


몇 개월 후 남동생이 태어났다. 요즘 말로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인 거다. 실망한 건 아니다. 성별이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 엄마 찾아갈 거야!!”

사단은 엄마가 동생을 향하고 눕는 바람에 나에게 등을 보인 것이다. 마냥 누워서 꼼지락거리다가 칭얼대는 고것에게 마음을 뺏긴 엄마였다. 시도 때도 없이 엄마의 가슴을 차지하는 게 무엇보다 참기 어려웠다. 나에게는 금지된 가슴. ‘나만의 엄마였는데...’ 여러 번 항변해보았지만 받아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날 밤, 가출했다. 따뜻한  이불속에서. 온전한 내 것이라곤 없는 것 같은 방에서 담요 하나를 챙겼다. 스누피에 나오는 라이너스의 담요처럼 나비넥타이를 한 기린이 그려진 ‘내 담요’가 있었다. 키보다 작은 크기의 그 담요를 맨바닥에 펴고, 위에 웅크리고 누웠다. 연탄불로 뜨겁게 달구어졌다가 식어가는, 한 겨울 방바닥은 찼다. 타이타닉호 같은 호화 여객선을 타다가 몸 하나 간신히 의지할 수 있는 나무판자에 띄워져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조난자 같았다. 불쌍해 보이고 싶어서 안달이 났던 차에, 맘에 드는 모양새였다. 엄마가 달랬으나, 못 이긴 척 받아들여야 할 때를 놓치는 바람에 한동안 그 꼴로 남겨졌다. 팔, 다리가 풀려 바닥에 살짝 닿을라치면 진짜 바닷물처럼 찌릿하게 차가웠다.


그날의 와신상담 이후, 차가운 방바닥에서 입이 돌아가는 대신 마음이 돌아갔는지 갖은 못된 짓을 했다. 아이들에게 40개월은 큰 차이다. 내가 늘 더 많이 먹고, 많이 가졌다. 골려먹고 쥐어 박고. 동생이 정글북 책에 나오는 호랑이 그림을 유독 무서워했는데, 그걸로  놀라게 하곤 깔깔거렸다. (얼마 전에 동생이 정글북 호랑이 그림을 무서워했던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데 뜨끔했다.) 다른 집 애들과 더 재미있게 놀았고, 시비가 붙었을 때에는 다른 애들 편을 들기도 했다. 내 악 쓰는 소리와 섭섭한 동생의 울음소리가 범벅이 되어 끊이지 않았다. 그 바람에 지방 외가댁에 잠시 유배된 적도 있다. 친구도 없이 작은 감자나 캐면서 지루하게 보내면서도 동생을 보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나는 우리 집 귀염궁이'

동생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후, 공책에 ‘나는 우리 집 귀염궁이’라고 써 놓은 것을 봤다. ‘귀염궁이? 귀여워해 준 적이 있던가?’ 전혀 다른 기억들만 떠올랐다. 제일 못됐던, 그래서 한 번도 고백하지 못했던 일은 성당 헌금을 빼돌린 일이다. 내 것 100원과 함께 동생에게 전해야 하는 100원을 더 받았었다. 그러나 껌을 샀다. "동생 100원 안 줬어?" "줬어요." "아니에요, 안 받았어요." 나는 나가도 좋다고 했다. 나조차도 무서워서 거짓말로 피고 하고 싶은 곤경에 동생을 두고 돌아섰다.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억울했는지, 무서웠는지, 혹시 그냥 넘어갔는지 모를 일이었다. '귀여워해 준 적이 있던가?' 기억을 끄집어낼수록 단물이 느껴지지 않는 뻑뻑한 껌을 씹어 대는 것 같았다. 갑자기 나타나서 내 것을 모두 가져가더니만 가끔은 돌봐줘야 하는 부담까지 주는 동생이 곱지 않았다. '동생은 아기잖아.'라는 태생적인 양보의 미덕도 싫었다.


하지만 동생은 예쁜 아이 었다. 흥이 많고, 착했다. 곰인형이 빨래한 수건을 볼에 비비적거리며 '엄마품처럼 포근해요~'라고 하는 세제광고가 있었다. 동생은 그 곰을 보고 엄마가 없나 보다며 안쓰러워했다. 극본 형태로 교과서에 실린 청개구리 이야기(청개구리가 반대로만 하는 것을 아는 청개구리 엄마가 유언으로 물가에 묻어달라고 하는 _ 애들 읽는 이야기가 왜 그렇게 슬펐나 싶다.)를 읽어주자 불쌍하다며 엄마품을 파고들어 훌쩍였다.


노트를 훔쳐보고 놀려 대는 것이 평소의 나다운 모습이었겠으나, 울먹이며 동생에게 대뜸 미안하다고 했다. "엄마, 누나 이상해. 나한테 미안하다면서 울어!" 갑작스럽게 묵은 사과를 받고 당황한 동생과 달리 엄마는 침착했다. "지금부터라도 잘하라고 해." 엄마 말대로 그때부터라도 잘했으면 좋았으련만 사람이 변하기는 쉽지 않다. 여전히 골려 먹고 빈정 대거나 관심 없어했다. 점차 동생도 제 나름의 생활을 만들어갔다. 방도 따로 쓴다고 했다.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잠드는 일도, 어린것이 어디서 들었는지 좋아하는 밴드가 생겼다고 해서 구입 한 비틀스 카세트테이프를 앞 뒤로 바꿔가며 늦게 까지 듣던 일도, 서로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자기 전 기도를 드리던 일도, 불을 꺼놓고 막춤을 추던 일도, 엄마를 방공호 삼아 투닥거리는 일도 없어졌다.


집안은 내 위주로 돌아갔다. 동생과 입학식, 졸업식이 겹치기도 했지만 내가 혼자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서로에게 장난을 칠 만큼 심심할 틈도 없었고, 찾는 일도 드물었다. “왔어?” “응” 이런 대화만 오가는 우리는 데면데면한 남매지간이었다.


“잘 다녀와”

주변이 훌쩍이기 시작했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았다. 감성적인 분위기는 기대도 안 했다는 듯이 동생은 가볍게 인사하고 훈련소로 성큼 거리며 들어갔다. 덤덤한 척했지만, 동생의 등에서 시선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출렁거리며 밀물처럼 훈련소 입구까지 끌려 들어갔다가, 푸념하며 썰물처럼 슬금슬금 돌아섰다. '왜 하필 얇은 점퍼를 입었지? 춥게.'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동생이 가끔 “군대에서 너무 춥게 지내서 추위를 많이 타. 누나 철원의 겨울이 얼마나 추운지 알아?”하고 능청을 떨 때면, 그때 그 얇은 검정 점퍼를 입고 뒤돌아서던 모습이 떠올라 나도 추운 기분이 들 정도다. 동생을 두고 돌아오는 차 안은 조용했다. 그렇게 어색하지 않은 적막은 처음이었다.


“낙지볶음 먹을까?”

서린동 사거리였다. 아무도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모두 속 깊이 허기를 느끼고 있었다. 훈련소에서 헤매고 있던 정신을 끌어 잡은 건 낙지볶음의 양이었다. “뭐 양이 이렇게 적어!” 누구라도 들으라는 듯이 내뱉었지만, 곧 충분하고도 남는 양이라는 걸 알았다. 너무 매웠다. 군에서 변장을 하고 잠복을 하듯, 낙지는 검붉은 양념 속에 숨어 있다가 젓가락에 이끌려 쑤욱 일어났다. 낙지의 선제공격. 미끈한 다리로 입 안을 흠씬 두들기더니, 어떤 독한 화학무기로 혀를 마비시켰다. 그러면 나는 맛이랄 것도 없이 수십 년간 연마해온 저작운동으로 통통한 낙지를 몇 번 찢어서 간신히 목구멍으로 넘길 뿐이었다. 승리를 기념하듯 얼굴의 모든 모공이 일어나 만세를 부르고 눈물 같은 땀이 났다. 가게 옆 슈퍼에서 아이스크림까지 사 먹으며 소란을 피웠다. 한 숨 자고 일어나 화장실에 갔는데, 소변까지 매웠으니 그 이후로 감히 그 집을 찾은 적이 없다.


그렇게 속에 열을 지핀 후, 옛날에 차가운 방바닥에서 얼어버린 마음이 조금 녹는 듯했다. 식탐이 생긴 김일병에서 일찍 일어나고 옷 정리 잘하는 김상병이었다가, 결국 누워 있기 좋아하는 김병장으로 제대할 때까지 딱 한번 면회로 마무리한 누나였지만.  


“결혼하고 싶대”

이제 막 이십 대 중반에 들어선 동생이 한 말이라는데, 왜 그렇게 현실적으로 느꼈는지 모르겠다. 쑥스러워서 사과하지 못했던 일들, 함께 해 보고 싶었던 것들이 시시콜콜하게 떠올랐다. ‘아직 아니야. 나에게 시간을 줘.’ 하는 생각이 들자 왈칵 눈물이 났다. 내 동생과 만나줘서 고맙다고 생각하던 OO가 갑자기 미웠다. 이렇게 못된 시누이가 되는 건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동갑내기 남자친구와 결혼한 친한 언니가 “걔가 고등학교 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해서 10년 동안 집에서 나와 살았는데, 결혼한다니까 못 보낸다고 우셨다잖아. 형도 결혼해서 처음도 아닌데...”라며 이해 불가한 시어머니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그 어머니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아들에게 잘 못해줬을 것이다. 첫째에게 쏟느라 둘째에게 소홀했던 미안함, 멀리 있어서 하기 어려웠던 살가운 배려를 이제 맘껏 하기 어렵다는 아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언제나 시간이 있을 것이라고 게으름을 핀 자신이 싫어서 생떼를 쓴 것 일 게다. (그 어머님도 곧 친구분들에게 언니 자랑도 하고 예쁜 옷도 사주셨단다.) “결혼한다고 했다며.” “내가? 하겠지. 지금 당장은 아니지. 준비도 없이.” 동생의 결혼은 미수 또는 오보로 마무리되었지만 그날 이후 내 마음은 또 한번 흔들렸다.


“우리 가족도 한 달에 한 번은 외식을 합시다!”

부담스러운 정기회의 같은 이 제안이 잘 먹힐 리가 없었다. 간신히 가족여행이나 몇 번 갔으나, 그나마도 동생과 나 사이에 큰 소리가 나곤 했다. '내가 비행기 값을 냈네', '우린 안 맞으니 이게 마지막 여행이네.' 하면서 으르렁 거렸지만 어느새 또 비행기에 나란히 앉아 있곤 했다.


북한에서는 오징어를 낙지로, 낙지를 오징어라 불러 남북 간의 교역이 시작되면서 수산업자들을 당혹스럽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낙지라고 수입한 것을 뜯어보니 오징어가 들어있었다나 …. 북한의 조선말 대사전에는 ‘낙지는 다리가 10개로 머리 양쪽에 발달한 눈을 갖고 있다’고 되어있다.  <출처>


같은 언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단 몇십 년 만에도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곤란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 가족도 그렇다. 정작 친구들의 마음은 살펴보고, 연인의 못난 구석은 참아보고, 직장인에서는 안 맞는 사람과 상황에도 의연하게 대처하느라 온갖 노력을 하면서도 동생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참아주고, 받아주기보다 내 맘에 들기를 원했다. 여행지에서 즐겁고 신명 나게 놀라고 기분까지 정해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동생은 군에서 어떤 깨달음이 있었던지 전공을 바꾸려고 수능을 다시 봤다. 정태형. 모두 이렇게 부르니, 성이 정이고 태형이 이름인 줄 알았다고 하는 에피소드처럼, 다시 하는 대학생활이 자연스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졸업 후 바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취직을 하더니, 얼마 전에는 그 회사를 다른 준비 없이 퇴사한다고 해서 걱정했다. 그런데 또 다음 직장을 찾아내서 지금은 입사연수에 들어가 있다. “동생은 뭘 해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오빠가 있는 친구에게 말했더니, “우리 오빠도 나를 바라볼 때 그럴까?” 했다. 동생들도 어른이 된다. 뿐만 아니라 충분히 잘 한다.


동생이 "나한테 말했어야지." 하는데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한 번도 상의하거나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많이 힘들었는데, 동생은 어떤 시간을 보낼까? 그제야 이 세상에서 나와 가장 닮은 사람이 동생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같은 유전자를 조합해서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오랫동안 함께 시간과 기억을 나누었다. 그래서 어떤 기쁨과 어떤 아픔은 나와 동생만 알 수 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외할아버지마저 돌아가셨을 때, 엄마는 집안 어른께 “이제 저는 고아네요.”했다. 나로서는 아무래도 가늠할 수 없는 감정을 외삼촌들은 알 수 있다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동생을 찾게 됐다. 그는 어느 순간 내가 느끼는 것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세상에 단 한 명이 될 것이다.




서린동의 그 낙지집을 다시 찾았다. 10년이 조금 지났는데도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반가웠다. 병원에 주사 맞으러 제 발로 들어선 것처럼 너무 매울까 봐 안절부절못할 정도였다. 그런데 맛있었다. 전에는 '아프게' 매웠는데, 오늘은 '맛있게' 매웠다. 가게 옆 슈퍼에 가서 아이스바를 사 먹는 수고를 덜 수 있도록 계산대 옆에 공짜로 먹을 수 있는 아이스크림도 있었다. 여전히 혀가 매워 한동안 정신 차리기 어려웠지만 분명히 다시 찾게 될 것 같았다.   


동생에게 글을 보여주었다. 껌 사건도 생각이 안 나고, 그렇게 못되게만 굴던 누나도 아니라고 말해주어 마음이 놓였다. 동생에게 내가 어떤 누나인지 물으니, "고맙지" 했다. 오글거렸지만, 마음에 들었다. 서린동의 낙지 맛처럼 상황에 따라 서로에 대한 느낌이 계속 변할 것을 안다. 고맙다가, 애잔하다가, 짐처럼 느껴지다가, 든든하다가, 밉다가 또 고마울 것이다.



점점 집이라는 물리적인 공간도, 부모님을 중심으로 한 가족이라는 궤를 따라 공전과 자전을 하던 것도 약해진다. 서로를 찾지 않아도 늘 가까이 있던 때는 지났다. 그만큼 서로가 서로를 위해 부지런하게 움직이여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시간이 계속될 수 있다. 동생도 조금씩 내 문자에 빨리 답한다. 연애 고민도 꺼낸다. 외출을 제안하는 일도 생겼다.


여전히 나는 그가 욕심이 더 있었으면 싶다. 한편 동생은 내가 좋아하는 걸 자신에게 강요하는 것 같아서 답답하단다. 이런 것들이 해결되는 건 어려울 거다. 사람이 바뀌기 쉽지 않다. 하지만 서로의 못난 부분까지도 양념으로 버무려 즐기는 것. 그것이 어른이 된 우리가 시작한, 노력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조금 늦게 서로에게 '고맙다, 미안하다'하기 시작해서 굳은 근육처럼 느릿할지 모르지만 또한 오래갈 것을 기대한다. 다리를 많이 가진 낙지처럼 이 다리로 안되면 저 다리로, 저 다리 끊기면 또 이 다리로 잡았다 놓았다 하면서 말이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특별한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다복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매콤한 낙지를 씹으며 마음을 곱씹어본다.


사랑을 ‘어떤 일이 있어도 끝까지 놓지 않는 손’이라고 풀이한다면,

나는 동생을 그 누구보다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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