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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영 Feb 19. 2016

개봉 10주년을 맞은 <이터널 선샤인>과 세 개의 기억

감독 미셀 공드리, 드라마, 멜로/로맨스, 2004

Blessed are the forgetful, for they get the better even of their blunders. - by Nietzsche
망각한 자는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다. – 니체



10년 전 종로에 있던 영화관 이름을 기억하려고 애써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와 있는데도 무력감을 느끼던 때였다. “아무거나 봐” 영화는 그에게 맡겨두고, 캔맥주 살 곳을 두리번거렸다. 그는 마시지 않았으므로 내 것만 사면됐다. 우린 같은 회사에 다녔다. 그는 회사가 있는 삼성동 근처에 살면서도 매일같이 안국동에 있던 우리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퇴근 후 자주 영화관에 들렸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그 영화관은 작고 낡았다. 내 기분과 닮은 푹 꺼진 의자에 늘어지게 앉았다. 쑥스러웠는지 검은 비닐봉지로 감싼 캔맥주를 의자 손잡이에 꼽았다.


조엘(짐 캐리 분)은 출근길에 충동적으로 몬토크 행 기차를 탄다. 이유는 모른다. 그리고 어깨를 움추러뜨리는 겨울 해변에서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 분)을 만난다. 처음 보지만 왠지 그녀가 좋다. 그녀도 적극적으로 호감을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어젯밤까지 연인이었다. 다툼 끝에 클레멘타인이 ‘아픈 기억을 지워주는 회사’를 찾아가 조엘에 대한 기억을 지웠다. 조엘이 이 사실을 알고 홧김에 자신의 기억도 지우기로 한다. 하지만 기억이  지워질수록 잊고 있던 아름다운 순간들이 되새겨진다. 영화 내내 조엘은 그 기억을 간직하기 위해서 처절하게 애쓴다. ‘Please, let me keep this memory, just this moment.’(제발 이 기억만은 남겨주세요, 이 순간만큼은.) 그가 아무리 외쳐도 기억은 하룻밤 새 말끔히 지워진다. 그런데도 그는 지금 '낯설지만 익숙한' 클레멘타인과 함께 있다. 그때 ‘기억을 지워주는 회사, Lacuna'로부터 각자 우편을 받는다. 기억 삭제를 의뢰하며, 지긋지긋한 서로에 대한 기억을 녹음한 테이프이다. 클레멘타인은 도망치듯 일어나 ‘지금은 우리가 서로 좋아하더라도 결국 넌 내 부족한 부분을 싫어하게 될 테고, 나도 네가 지루해질 거다’라고 울먹거리며 떠나려 한다. 그때 조엘의 한마디는 간단하지만 충분했다.

Okay


그리고 나도 정말 괜찮아졌었다. 몇 년 동안 매일같이 집에 바래다주면서도 주말이면 아침 일찍 먼저 찾아오던, 내가 그를 사랑하는지 확인받고 싶어서 늘 어렵게 굴던, 술을 싫어해서 나를 알코올 중독자처럼 느껴지게 할 만큼 까탈스럽던, 잘 보이고 싶은 만큼 서로에게 못난 구석을 여과 없이 보일 수밖에 없었던 그가, 좋지도 싫지도 않았을 때였다. 짧은 연애만 몇 번 하던 나의 스믈 후반을 꽉 채운 그였다. ‘너처럼 쉽게 헤어지자고 하면 어떤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겠냐?’ 내 입장에서 보면, 다툼의 원인이 '그'였는데, 양보와 끈기를 가르쳐주었던 것도 '그'였다. 그런 그가, 그와의 시간 덕분에 Okay, 괜찮아졌었다. 끝내 우리는 헤어졌다. 그 후 꽤 오랜 시간 동안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 그에게 위로가 된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다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후, 문득 마음 깊이 미안하고 고마워했던 밤이 있었다는 것도 그에게 닿을 수 있다면 좋겠다.



개봉한지 몇 년 후, 명동 중앙극장이 폐관 기념 상영작으로 이터널 선샤인을 걸었다.

(내 기억으로)  2층짜리 본관은 오랫동안 손보지 않은 호화주택 응접실 같았다. 결혼식날 사랑에 배신을 당한 충격으로 몇십 년 동안 낡은 웨딩드레스를 입고 사는 <위대한 유산(찰스 디킨스 작)>의 미스 해비셤, 또는 40년인가 50년인가 귀밑머리만 풀고 고스란히 앉아 있다가, 늦게나마 돌아온 신랑이 어깨를 어루만지자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 않아 버린 서정주의 <신부>가 생각나는 곳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이곳에서의 이터널 선샤인도 처음 보았을 때만큼 생생했다. 영화 말미에 Beck이 부르는 <Everybody's Gotta Learn Sometimes>가 관객이 드문드문 박힌 영화관을 가득 채우다가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라는 제목으로 마침표를 찍었을 때, 나는 또 한번 Okay, 괜찮아졌었다. 뒤엉켜서 쉽게 풀리지 않는 말, 해체가 되지 않아 통째로 집어삼켜야 하는 심정, 결국 뭉뚱그려 괜찮다고 할 수밖에 없는 상태, 쓰지만 단 초콜릿 같은 이 영화를 오랫동안 제일 좋아하는 영화로 꼽아왔다.



이터널 선샤인이 10주년을 맞아 재개봉했다.

이번에는 광화문 스폰지하우스다. 이곳의 입구를 찾는데 늘 애를 먹는다. 흥행과 거리가 먼 영화들을 오랫동안 상영하는 여유를 부리는 곳이다. 그 덕분에 다른 곳에서 보기 어려운 영화를 숨차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영화는 그대로였지만 나는 조금 달랐다. 몬토크 행 기차에 자신을 욱여넣는 조엘이, 클레멘타인의 변하는 머리색만큼 흔들리는 시선이, 괜찮다고 하면서 다시금 사랑을 시작하는 마지막 장면이 담담했다. 대신 매리(커스트 던스트 분)에게 시선이 갔다. 그녀는 '기억을 지우는 회사, Lacuna'의 리셉셔니스트다. 매리는 Lacuna의 설립자인 박사에게 호감이 있다. 그에게 똑똑하게 보이고 싶어서 읊조린 니체의 명언이 ‘망각한 자는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다.’이다. 그녀 역시 사랑했던 사람의 기억을 지웠다. 다른 의뢰자들처럼 그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실수를 망각의 복으로 잊으려 했던 매리는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되고 Lacuna를 떠나려 한다. 기억을 지운 상대가 다름 아닌 박사였다. 부인이 있는 그가 괴로워하는 매리를 위해 제안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녀는 회사를 떠나며 동료 스탠(마크 러팔로 분)에게 자신이 기억을 지우기 전, 박사와 함께 있을 때 어때 보였냐고 묻는다. 스탠은 대답했다. “You looked happy.” 모든 의뢰자들에게 우편을 보내서 본인들이 기억을 지웠다는 것을 알려준 사람이 매리이다. 영화를 볼 때마다 그녀가 배신감 때문에 화가 났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은 깊은 상실감이었다. 아픈 기억을 지워주는 회사의 이름인 Lacuna는 라틴어로 '잃어버린 조각'이란 의미다. 매리는 잃어버린 기억 때문에 온전할 수 없었다. 그것이 비록 아픈 것일지라도 매리는 '그때의 그녀'를 갖고 싶어 했다. 아마도 속으로 중얼거렸을지도 모른다.

‘기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오래전에 없어진 종로의 그 영화관 이름을 아직도 모르겠다. 명동 중앙극장 자리는 공사 중이다. 작년 말에는 즐겨 찾던 소격동 씨네코드 선재가 폐관했다. 그런데 이곳 광화문 스폰지하우스에 오면 들르던 카페 아모카도 닫혀있다. 다문 입 같은 문에 그동안 고마웠다는 메모가 붙어 있었다. 이 카페의 큰 창을 통해 맘껏 볕을 쬐던 내가 남긴 쪽지 같았다. '곳'과 함께 이런저런 기억들이 사라지는가 싶어서 섭섭해지려 했다. 하지만 이터널 선샤인을 보고도 담담한 나였다. 나도 변하면서 주변은 그대로 있으라고 하는 게 무슨 억지인가? 모든 것은 아닐지라도 많은 기억을 잊지 않고 있다. 모든 기억이 좋을 수 없지만, 모든 것이 소중하다. 따뜻하건, 애잔하건, 쓰라리건, 담담하건, 그 모든 기억들이 있어야 온전한 내가 될 수 있다. 아무리 모르겠고, 아무리 못나보여도 '지금'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다.

"사랑은 지금이다. 사랑은 '하였다'도 '하리다'도 아니다. 언제나 사랑은  '한다'이다." - 고은, 상화 시편 中

기억으로 인해 얻은 두려움, 오만, 편견, 익숙함을 부단히 걷어 내고 지금을 그 자체로 살아야겠다. 기억을 지우지 않기 위한 고단한 질주 끝에, "(클레멘타인) 이 추억도 곧 사라지게 될 거야, 어떡하지?"에 대한 조엘의 답처럼 ‘지금’을 보내면 될 뿐이다.

Enjoy it

                                 < 영상 : Everybody's Gotta Learn Sometimes by Bec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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