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도 비가 내렸다. 우리 둘 다 다이아몬드보다는 아무래도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더 관심이 가는 편이다. 하긴, 다이아몬드에 관심을 가져본들 그것이 우리 것이 될 리 만무하지만.
비를 맞으며 향한 마스 박물관 (MAS Museum). 차를 타기도, 걷기도 애매한 거리였다. 가는 길엔 친절한 버스기사가 공짜로 버스를 태워주는 횡재를 누렸지만, 돌아오는 길은 비바람 속의 고행길이 되었다.
박물관은 옥상의 파노라마 공간을 포함해 총 10층의 현대적인 건물로, 세계 교역의 중심지였던 안트워프의 역사적 자취를 느껴볼 수 있는 곳이다. "권력", "항구와 도시", "삶과 죽음", "인간과 신"등을 주제로 한 상설 전시관도 인상적이긴 했지만, 사실 우리가 겨냥한 것은 3층의 기획전 "거울 속의 세상 (THE WORLD IN A MIRROR)"이었다.
오랜 세기 동안, 인간은 그들이 본 세상을 그림으로 옮겼는데, 지도와 지구본이 그것이다. 지도는 그 시대 사람들의 마음과 지식을 반영한 것으로, 과학의 발전과 함께 인간에게 비친 세상, 그들이 발견한 세상의 모습도 계속 변화한다. 그래서 지도는 우리의 거울과 같다고 이 전시는 말하고 있다.
중세로부터 르네상스, 17, 18, 19 세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수많은 지도들을 접할 수 있는 진귀한 전시였다. 신화에 가까운 그림책 같은 지도에서부터, 성경이 모티브가 된 중세의 지도도 흥미로웠다. 16 세기경부터 인간은 탐험을 거듭하며 세상의 지평을 넓혀갔고, 동과 서가 만났으며, 지도 위의 점들도 그 모양과 위치를 잡아가기 시작한다. 오늘날의 예술가들은 그 지도 위에 자신들이 보는 세상의 형상을 반영하기도 한다. 우리가 지금 바라보는 세상 또한 어쩌면 '환상 (illusion)'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예술적 영감, 혹은 직관에서 일까?
큰 기대 없이 전시실에 들어섰던 나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이 전시에 완전 빠져들고 말았다. 앞서 가던 딸아이를 얼핏 보았는데, 한참을 지나서야 놓친 걸 알아차리고, 나를 두고 말없이 가버린 딸을 1층부터 10층까지 찾아 헤매다가 지쳐, 결국 방송까지 부탁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온 엄마가 딸 희경이를 찾습니다. 옥상에서 만나자!”. 그 순간만큼은 정말 옥상에서 한 판 붙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박물관 곳곳으로 딸의 이름이 어색한 발음으로 울려 퍼지던 순간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전시를 보면서 한 편으로 잊혔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는데, 어린 시절 우리 3남매 방에 아버지가 걸어 주셨던 세계지도이다.
대학에서 건축학을 가르치셨던 아버지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신 기억은 없다. 흔히 하는 “공부하라”는 말 조차 들어 본 적이 없다. 실은 이야기 자체를 나눠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아버지는 항상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어서 “아빠!”라고 부르는 것조차 어색해했던 우리들은 대신 “아빠여!”라고 불렀다.
세상에, “그대여!”도 아니고….
그런 아버지가 말 대신 행동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 많았다는 것을 돌아가신 이후에서야 회상하게 된다. 하나하나 늘어가던 하모니카나, 실로폰, 멜로디언 같은 악기들과,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생긴 탁구대, 아버지가 정성껏 가꾸시던 화단과 함께 오르던 뒷산, 아버지의 손에서 나의 손으로 옮겨졌던 잠자리와 도마뱀, 매일 아침이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운동하시던 모습, 나에겐 자명종 소리와 같았던 AFKN 영어 방송…
그중에는 아무 말없이 우리들 방에 걸어 놓으셨던 세계지도도 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더 넓은 세상을 알려 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라고 가르쳐 주신 것도 같다. 학교에서 ‘지리’라는 과목을 공부하기도 전에, 지리적 인식이 싹트기도 전에, 나는 지도 위의 많은 이름들을 짚어보며 어렴풋이 언젠가 그곳들을 가보리라 마음먹었었다.
오늘 나의 딸과 여기에 오게 된 것은 아버지의 세계지도 덕분이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아버지가 곁에 계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