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9시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활동하기에 충분히 밝기만 하다. 여름이면 극지방은 해가 지지 않는다고 알고 있지만, 중부 유럽만 해도 10시가 넘어서야 어스름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해서 11시는 되어야 밤이 찾아오는 것이 신기했다. 덕분에 시간을 아주 길게 쓸 수 있다는 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시간을 공짜로 마구 버는 기분이랄까?
보통 벨기에 여행에서 헨트는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우리도 다음 여행지인 브뤼헤에 숙소를 정하지 못해 거쳐 가기로 한 곳이지만, 시간이 있으면 더 머물고 싶은 곳이었다.
추적추적 비는 내렸지만, 한눈에 봐도 웅장한 중세의 성당과 그만큼 오래된 시가지가 운치 있는 곳이다. 비마저 신비로움을 더하는 느낌이어서, 잠시 넋을 잃고 거리에 서서 비가 서서히 그쳐 가는 그 거리를 한참 바라본다.
우리는 이 곳에서 처음 ‘분홍 코끼리’를 만났다.
소문에 의하면, "델리리움 녹터넘(Delirium Nocturnum)", 일명 "환각의 밤"이라 불리는 이 맥주를 마시면 분홍 코끼리가 보인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다. 이 맥주가 분홍 코끼리라 불리는 이유이다.
‘호기심 천국’인 나와 딸이 벨기에 입성 이후의 첫 미션으로 이 분홍 코끼리 사냥에 나선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헨트 역에서 숙소로 직행하지 않고 트램을 타고 중간에 내린 곳은 딸이 인터넷 서핑으로 발견한 맥주 집 "Café TROLLEKELDER"이었다.
창가에 앉으니 성 야곱 성당 (Sint-Jacobskerk)이 바로 마주 보인다. 어두워 가는 창 밖의 풍경과 함께, 맥주를 음미하며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카페 분위기가 그저 평화롭다. 이렇게 평화로운 맥주 집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을 만큼…. 성공적인 맛 집 사냥에 고무된 데다, 곧 분홍 코끼리를 포획하게 된다는 사실에 그저 신이 난 두 모녀는 술을 마시기도 전에 이미 환각 상태가 되었다.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니, 조금은 낯설게 보이는 풍경이 그 누구도 맥주를 안주와 섞어 마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땅콩 한 알도 용납하지 않다니 아무래도 벨기에 인들의 맥주 사랑은 각별한 것 같다. 그만큼 다양한 맛의 맥주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맥주 자체의 맛을 충분히 음미하기 위해서인 듯 하지만, ‘안주 킬러’인 나에겐 조금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한편으론, 그동안 정작 술맛도 제대로 모른 채 퍼 마신 그 많은 술들이 아깝게도 느껴진다.
아쉽게도 일명 "환각의 밤"이라 불리는 "델리리움 녹터넘 (Delriium Nocturnum)"이 없는 관계로, 그와 3종 세트 중의 하나인 "델리리움 트레멘스 (Delirium Tremense)"와 바나나 맛의 맥주인 "MONGOZO"로 건배를 했다.
“쌍떼! 오늘을 위하여!”
1년 넘게, 건강 상의 이유로 금주를 한 이후 오랜만에 마시는 한 잔의 술이 너무도 달콤하다. 겹겹이 쌓인 스트레스를 한방에 날려 버린 뒤, ‘환각의 밤’은 브뤼셀 입성 이후로 기약하며, 노곤해진 몸을 이끌고 오늘의 보금자리로 향했다.
집주인이 집 앞에 까지 나와 서있다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농사일을 거들며, 청소년 선도를 위한 프로그램에도 참여하고 있는 건실한 젊은 여성이다. 그녀의 3층 집은 타지에서 공부하러 온 학생들로 늘 북적이지만, 방학을 맞아 모두 고향으로 내려간 지금, 이 집은 온전히 우리 차지가 되었다. 2층에는 침실이, 1층에는 부엌 뒤쪽으로 작은 안뜰이 있는 아기자기한 집이다. 이래저래 기분 좋은 밤이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는 이 도시에 신비로움을 더해주고...
그 어느 곳에서 보다 평화롭게 맥주를 마신 공간으로 기억될 곳
이 곳에서는 맥주마다 각기 다른 모양의 잔이 사용된다. 분홍 코끼리가 그려진 앙증맞은 맥주잔이 사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