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샤넬과 마치악

엄마와 딸이 함께 한 유럽 감성 여행

by So young

샤넬은 린다가 키우는 개 이름이다.

애완견은 키우는 사람의 성격을 그대로 닮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정말 맞는 말이다. 자기랑 비슷한 개를 택하는 것인지, 키우다 보니 닮아가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내가 본 사례들은 거의 예외가 없었다. 순한 개의 주인은 순둥이고, 앙칼진 개의 주인은 신경질적이다. 시크한 개의 주인은 영락없이 멋쟁이이다. 조용한 개의 주인은 우울하고, 발랄한 개의 주인은 명랑 쾌활하다.

샤넬은 마지막 케이스로, 주인처럼 어찌나 붙임성이 좋고 사교적인지 처음 보는 우리에게 린다만큼이나 서슴없이 다가왔다.


처음엔 빨간 공을 물고 옆에 와서 알짱거리기에 이해를 못했는데, 알고 보니 그 공을 멀리 던져 달라는 표시였다. 풀 숲 어딘가에 떨어졌을 공을 어쩌나 쉽게 찾아내던지, 던지기가 무섭게 냅다 달려가 물어다 놓고 또 던져 주기를 재촉하는 눈빛을 보낸다. 나중엔 빨리 던져주지 않으면 아예 손에다 쥐어 줄 기세로, 어느새 우리는 개에게 완전 제대로 훈련이 되어 끊임없이 공을 던져 주고 또 던져 주고 있었다. 지치지 않는 샤넬의 놀이에 우리도 모르게 빠져들어 깔깔거리고 있는 모습이라니.. 정말이지 단순하면서도 밝은 에너지를 주는 개다.


어린 시절 이후로 개를 키워 보지 못했다. 아이들이 너무나 강아지를 갖고 싶어 했지만 마당이 딸린 큰 집으로 이사 가면 사주겠다고 줄곧 미루곤 했다. 물론 마당 딸린 큰 집은 아이들이 다 자랄 때까지, 또 지금 까지도 이루지 못한 꿈이다.

지금껏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개를 키워보면 어떨까 상상해 본다. 자식들에겐 못해준 일을 언젠가 손주들에겐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려면 마당이 딸린 큰 집이 있어야 할 텐데…

그런데, 내가 키우는 개는 어떤 모습일까? 착할까, 못 됐을까? 얌전할까, 장난꾸러기일까?

마치악은 린다 친구의 아기이다.

근처에 사는 린다의 친구는 주말도 없이 매일 과일 가게에서 일을 하는데, 아기를 맡길 곳이 적당하지 않아 가끔 친구의 신세를 지는 눈치였다. 린다는 우리를 집에 들이면서 다음 날 아기를 맡게 되었다고 연신 미안해했다. 우리의 잠을 깨우지 않도록 조용히 시킬 테니 이해해 달라면서.

아침 10시까지 세상모르고 잠에 떨어졌던 나는, 아침 일찍 오기로 한 아기가 오지 않았나 보다 생각했다. 집 안이 너무 고요했기 때문이다.

거실에 나와 보니, 파란 눈에 금발인 천사 같은 아기가 나를 바라보며 소리도 없이 생글생글 웃고 있다. 린다가 마당에서 일하느라 막아 놓은 거실 의자를 붙들고 서서.

아기의 초롱초롱한 깊고 푸른 눈이 나를 자석처럼 끌어당겨 한걸음에 다가가 덥석 안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악은 아직 돌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총명하고 사려 깊은 아기였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아기와 놀아 주면서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내 직관으로는 장차 과학자 내지 우주과학자가 될 자질을 가진 아기였다. (돗자리를 깔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는 20여 년이 지나 봐야 알 일이다.)

무엇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기보다는, 이처럼 빛나는 가능성의 아기가 자라면서 그 빛을 잃는다면 너무나 슬픈 일일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난 만나보지도 못한 아기의 엄마 대신 린다에게 당부 아닌 당부를 했다. 아기에게 좀 더 따뜻한 관심과 자극이 필요하다고, 장차 과학자가 될 수도 있는 총명한 아이라고.


마당에서 커피를 마시며, 마치악에게 동요와 자장가를 불러 주며, 느긋하게 점심시간을 보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아기가 잠드는 산골 집에 밤마다 찾아오는 이상한 저 별~”, “우리 아기 착한 아기 소록소록 잠들라~”.

마치악은 귓가에 나직이 올리는 이방인의 노랫소리가 싫지 않은 듯 짐짓 귀 기울여 듣는다. 이 노래가 아이의 기억에 남을 리는 없겠지만, 내 마음속의 한 조각 애정이나마 진심으로 전해졌으면 싶었다. ‘이 세상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결국 하나로 이어져 있단다. 아가야…’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마지막으로 ‘섬 집 아기’를 불러주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지난 밤 별 빛 세례를 받았던 언덕 위의 작은 정원
지금도 가끔 샤넬과 마치악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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