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길치’의 운명

엄마와 딸이 함께 한 유럽 감성 여행

by So young

계획했던 1차 원정의 끝자락이 보인다. 이제 이번 여행의 종착지인 룩셈부르크만을 남겨두고 있다. 그동안 작은 짐 보따리 하나가 늘었고, 떠나 올 땐 상상 조차 할 수 없었던 그 보다 훨씬 더 큰 이야기보따리를 전리품처럼 의기양양하게 짊어지고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끝날 때 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찜 해 두었던 유스호스텔은 예약이 한 발 늦었고, 마음 좋게 생긴 할아버지의 집을 가까스로 예약했지만 자세한 설명 없이 '오늘 이용불가 (unavailable today)'라는 문자가 날아와 우리를 실망시켰다. 다시 민박집 찾기 전쟁을 벌이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고, 룩셈부르크 역 근처의 저렴한 호텔에서 하루를 묵기로 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은 사실이다. 우선 먹고, 자고, 씻는 것과 같은 기본적인 일이 큰 과제로 주어진다. 인터넷이 깔린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잠잘 곳을 찾고, 먹을 것을 고르고, 방문하고 싶은 곳의 위치를 확인하는 일이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수월해졌지만, 수많은 정보를 취합해 결정을 내리고, 주어진 정보를 바탕으로 길을 찾는 일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게다가 우리는 첨단 무기 (LTE 모바일 폰)를 과감히 포기하고 전장에 나선 상태이다.

사실 나와 딸은 심한 ‘길치’여서, 초행길은 물론이고 몇 번 다녀 본 길 조차도 헤매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보니, 그렇지 않아도 길 찾는 데 보통 사람보다 몇 배의 에너지를 쓰는 셈이다. 상황을 더 어렵게 하는 것은, 이제 나는 돋보기라는 물건을 장착하지 않으면 지도를 볼 수도 없다는 것이다. 나는 나대로 서럽고, 딸은 딸대로 힘겨워하는 길 찾기가 끝나간다는 것이 그래서 조금은 후련하기도 하다.


다음 날 밤 안으로 위트레흐트 숙소로 돌아가야 했다. 룩셈부르크라는 나라가 작은 나라라고는 하지만 하루에 전부 돌아볼 수 있는 건 아니므로 전략이 필요했다. 선택과 집중.

우리는 이 곳의 시티투어 버스, ”Hop on hop off”를 타고 시내를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정류장마다 모두 내려 샅샅이 구경을 하고 싶지만, 그중에 딱 한 군데, 무담 미술관 (MUDAM MUSEUM)을 중점 타깃으로 점찍었다.

무담 미술관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의 피라미드 건물로도 유명한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 이오 밍 페이 (Ieoh Ming Pei)의 작품으로, 현대 작가들의 실험적인 작품이 많이 전시된 공간으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시티투어 버스 기사가 바로 미술관 옆에 내려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굳이 반대 방향으로 한 바퀴를 돌며 한참을 헤맨 뒤에야 버스에서 내린 장소로 돌아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제야 루브르의 피라미드를 연상시키는 뾰족한 유리 지붕이 발치에 보인다.

아… ‘길치’의 운명. 한숨과 탄식.

하지만, 잠시 숨을 고르며 떠오른 생각은 ‘길치’의 운명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미술관 반대 편 방향에서 우리는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멋진 건물을 만났는데, 희고 날렵한 수많은 기둥이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음악당이다. 마치 천상의 노래를 그대로 연주해 낼 것만 같은 아름다운 건물다. 헤매지 않았다면 절대 볼 수 없었을 그 아름다움은 ‘길치’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생각에, 나와 딸은 서로의 장애(?)를 축하해 주며 한 바탕 떠들썩하게 웃었다.

‘길치’의 운명은 좀 고달프다는 것, 그러나 한편 풍요롭다는 것.


전시 내용은 참신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를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오랜 시간 고군분투한 인간과 그 과학적 실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전시도 인상적이었고, 물방울의 움직임을 추적하고 순간의 파장을 포착해 낸 작품들, 세심한 기하학적 설계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조형물 등이 기억에 남는다. 특히 수많은 도르래와 다양한 무게의 추가 나무 막대를 움직이면서 입체를 만들었다 해체하기를 반복하는 작품은 신기함을 넘어 깊은 사색에 잠기게 한다.

어떤 ‘움직임’도, 어떤 ‘형상’도, 그냥 우연히 일어나거나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 무릇 결과에는 수없이 많은 ‘경우의 수’ 내지 ‘연결 고리’가 있다는 것, 결과만큼 그 과정이 소중하다는 것, 어쩌면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것, 여행의 의미는 어딘가에 다다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과정 자체라는 것, 인생도 그렇다는 것….


‘길치’이기 때문에 건질 수 있는 것도 있다. 마치 그 자체로 하나의 악기 같은 아름다운 건물이다.
무담 미술관 중앙 홀
예술가는 한 방울의 물방울 속에서도 세상을 본다.
정교한 움직임이 놀랍고 신기하다. 이 작가는 예술가이자 과학자임에 틀림없다.
시티 투어 버스 'hop on hop off'를 타고..
일요일 룩셈부르크 시내는 텅 비어 있다. 다들 어디로 간 것일까?
옛 성과 요새는 그저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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