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마중하는 길

by 준June

장마전선 아래에 있지만 비가 오지 않는 7월, 서울의 주말 하루는 지독한 찜통더위이다. 거리에는 뜨겁게 끓어 오른 수증기가 뒤덮은 것처럼 열기가 가득하다. 사실 이런 날에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소파에 길게 누워 시답잖은 티브이 프로그램을 보고 낄낄 웃어대며 하루를 보내는 것이 가장 좋으련만.


그래도 J를 보고 싶은 열망이 더 강렬했는지라 나는 그 열대의 한낮 오후, 그녀를 마중 가기 위해 서울역으로 향한다. 여자 친구를 마중하기 위해 기차역에 간다고? 오, 내게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여자 친구를 데려다주고 마중하는 모든 일들을 정말 싫어하고 귀찮아하던 내가, 그런 비효율적인 일은 20살 불 끓는 청춘 때나 하는 거라고 생각하던 나를, 망각하고는 신이 나서 지하철을 탄다. 역시 사람은 한 치 앞날의 일을 모르는 거다. 오만한 청춘들이여, 내일을 자신하지 말지어다!


지하철 의자에 앉아 9호선은 깨끗하고 시원하구나 안도하며 하루키의 에세이를 꺼내 읽는다. 이 아저씨 은근 위트가 있네, 소설은 신기하게 쓰면서 말이야 생각하던 차 지하철은 금세 노량진 역에 다다른다. 나는 1호선을 갈아타기 위해 역에서 내려 지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른다. 아니, 노량진 1호선은 지하가 아니었다니. 지상 위로 올라 가니 공기는 두터운 열기로 끈적하고, 시원한 9호선에서 겨우 식혔던 땀이 잡초처럼 끈덕지게 1호선 위에서 되살아 난다. 역사 밖에는 커다란 건물과 입시학원의 간판들이 즐비하다. 왠지 오늘따라 저 회색 건물과 간판들이 더욱 괴기스럽게 보인다. 이 뜨거운 여름날에도 입시와 취업을 위해 우리 불쌍한 청춘들은 이 더위보다 더 뜨겁고 더 갑갑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서울역으로 향하는 1호선 전철은 고시생들의 마음을 대변하듯 예정시간보다 3분 늦게 도착한다.


J에게서 대합실 내 편의점 앞에서 보자고 연락이 온다. 나는 조금 일찍 도착해서 그녀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두리번거린다. 몇 분이 지나도 그녀를 닮은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어디선가 동그란, 음, 꽤 동그란 얼굴의 여자가 손을 흔든다. 그렇다, J다. 그녀는 고향에서 계속 먹기만 해서 부었다며 뽀로통한 얼굴이다. 귀엽다. 그녀는 자기 얼굴이 동그랗냐고 묻는다. 나는 여지없이 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응, 이라고 대답한다. 아냐, 아빠는나 하나도 안 동그랗댔어. 그래, 아빠니까 그러시겠지. 고슴도치도 자기 자식은… 이라는 말이 다 끝마치기 전에 그녀는 흥 하고 새침해진다.

나는 사실 그녀의 동그란 얼굴이 좋다. 왜냐고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각지고 모난 얼굴보다는 동그란 얼굴이 더 좋지 않을까? 며칠 전 그녀가 자랑스럽게 그녀의 과거 사진들을 보여준 적이 있다. 사진 속 그녀는 하얀 테이블, 하얀 의자에 앉아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긴 생머리를 차분히 늘어뜨리고 있다. 하얀 테이블 위에는 분홍빛 꽃들이 가득 장식되어있는 결혼식장이다. 오뚝하고 날렵한 콧대와 가녀린 턱으로 고개를 살짝 숙인 채 핑크색 핸드폰을 보고 있는 그녀는 부드럽고 청순하며 세련된 이미지의 여자배우 같다. 그녀의 동그란 얼굴은 도저히, 정말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 아무래도 이건, 마술이다. 마술이 분명하다. 여하튼 사진 속 여배우만큼 얼굴이 갸름하지 않더라도 그녀는 충분히 예쁘고 매력적이니까. 동그란 얼굴도 좋으니까. 뭐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인다고 하면 할 말 없지만.


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캐리어를 끌며 다시 내가 온 길 그대로 되돌아간다. J의 집은 내가 방금 온 그대로의 돌아가는 길 중간에 있. 길을 잘 찾아가는 나를 보며 J는 똑똑하다고 칭찬한다, 뭐 사실 방금 온 길이라 기억 못 하려야 못 할 수 없는 것이지만. 별 거 아닌 칭찬인데도 기분이 좋다. 사실 어제 그녀와 사소한 다툼이 있었는데, 아직 그것이 완전히 풀리지 않아 조금은 서먹한 기분이었다. 그걸 풀려고 그녀가 의도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 덕분에 분위기가 밝아진다. 나는 칭찬받은 어린아이처럼 기쁜 표정으로 그녀에게 기분 좋다 말한다. 그런 나를 그녀는 엄마가 아이에게 하듯 우쭈쭈 해준다. 좋다. 나는 그녀가 좋다. 이 강렬한 여름의 열기보다 더 뜨겁게 그녀가 좋다. 시답잖은 다툼 따위 이 더위와 열정에 다 녹아버려라.


나는 그녀를 옆에 꼭 안는다. J는 내게 살짝 몸을 의지하며 졸린 얼굴을 기댄다. 1호선은 여전히 덥고, 9호선 급행열차에는 사람이 가득하지만, 우리 둘은 몸을 꼭 기댄 채 서로를 안고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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