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방

by 준June

소년의 방 안에는 하얀 침대가 있습니다. 커다란 창문 밖, 깜깜한 하늘 가운데 하얀 달빛이 소년의 침대 위를 비춥니다. 소년은 별을 보고 싶지만 도시의 하늘에는 좀처럼 별이 빛나지 않습니다.


소년은 늘 혼자였습니다.


화사한 꽃이 피던 어느 봄날, 참새 한 마리가 그의 방에 놀러 와 재잘댔습니다. 추운 겨울 매서운 바람이 부는 날, 그의 품에 와 잠을 청하던 검은 고양이 한 마리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잠시 그의 곁에 있다가 소년이 눈 뜨기 전 사라지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소년의 침대는 따뜻하고 편안했지만 참새는 소년이 사는 집보다 더 높은 곳에서 날길 원했습니다. 고양이는 푹신하고 커다란 소파와 반짝거리는 보석을 갖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소년을 찾지 않았습니다.


소년은 외로웠습니다.


그는 밤의 공기와 함께 노래를 부를 수 있었고, 달빛을 받으며 우아한 춤을 출 수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노래를 들어주거나 같이 춤을 추지 않았습니다. 그저 잠시 그의 방에 머물며 허기를 채우거나 비바람을 피하고는 다시 훌쩍 떠나버리곤 했습니다.


보름달이 뜬 어느 여름날, 만물이 조용하고 바람도 잠을 잘 때, 까만 눈의 한 소녀가 소년이 부르는 밤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달콤하고도 쓸쓸한 노랫소리에 소녀의 가슴은 두근거렸습니다. 그녀는 금으로 반짝이는 화려한 집에서 뛰쳐나와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작은 발을 움직이며 뛰어갔습니다.


노랫소리를 찾아 달리던 소녀는 창문가에 서 있는 소년을 발견하고는 말을 꺼냈습니다. "내게 다시 노래를 불러주지 않겠어?" 소년은 소녀에게 밤의 공기에 떠다니는 소리와 울림을 붙잡아서 바람에 부드럽게 날리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소녀는 그 노래에 흠뻑 빠졌고 소년은 그의 노래를 들어주는 소녀의 존재가 기뻤습니다.


소년은 소녀에게 말했습니다 "내 방으로 와서 함께 춤을 추지 않을래?" 소녀는 기꺼이 소년의 방으로 갔습니다. 소년은 수줍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고 달빛이 비치는 창가로 인도했습니다. 소년은 다시 밤의 노래를 부르며 소녀와 함께 우아한 몸짓으로 달빛의 춤을 추었습니다. 소년과 소녀가 움직일 때마다 방 안에 달빛이 찬란하게 빛났습니다. 달빛은 소년의 방을 밝게 비추며 그들을 축복해주었습니다.


소년은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소녀는 소년의 방에 몇 날 몇 밤을 함께 보냈습니다. 소년의 하얀 침대 위에서 소년과 소녀는 함께 서로를 꼭 안았습니다. 한밤 중에 소녀는 무방비 상태로 자고 있는 소년을 보살펴 주었습니다. 소녀의 온기에 굳게 닫혀있던 소년의 마음의 벽이 소리 없이 사라져 갔습니다. 며칠이 지나고 소녀는 소년에게 말했습니다."나와 함께 우리 집에 가지 않을래?" 소년은 자신의 방을 떠나는 것이 두렵기도 했지만, 소녀의 집에 갈 수 있다는 것에, 그녀의 많은 것을 함께 할 수 있음에 기뻤습니다.


소년은 소녀의 반짝이는 집에 손을 붙잡고 함께 들어갔습니다. 소녀는 용기를 내어 누구에게도 열지 않았던 자신의 방에 소년을 데리고 갔습니다. 소녀의 화려한 집은 소박한 소년의 방과는 사뭇 달랐지만, 소년은 소녀와 함께하는 행복에 더 용기를 냈습니다. 소녀의 집에서 소년은 이제껏 느껴보지 못했던 따뜻한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소년과 소녀는 함께 음식을 해서 나누어 먹고, 밤의 애상을 바람에 실려 들으며 노래 부르고, 꽃이 가득 핀 정원에서 손을 붙잡고 뛰어놀기도 하고, 소녀의 침대에서 함께 서로의 숨소리를 들으며 수많은 밤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소년의 마음에는 전에 없던 행복의 씨앗이 자랐습니다. 그가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행복이라는 감정이 그의 가슴속에 무엇보다 크게 자리 잡았습니다.


소년은 소녀를 위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어느 날 소년은 혼자 자신의 방에서 살았던 외롭고 어두운 얘기를 꺼냈습니다. 소년은 소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소녀는 소년의 어두움이 자신을 잠식할까 두려웠습니다. 그의 외로움을 모르겠는 건 아니었지만, 소녀가 감당하기에 그의 어두움은 너무 커다란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화려하고 신났던 자신의 얘기를 꺼내며 소년의 이야기를 사라지게 했습니다. 소년은 소녀가 그저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랐던 것뿐이었지만, 소녀는 그걸 생각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떨고 하늘이 사라진 것처럼 폭풍우가 치던 여름 어느 날, 소녀는 많이 아팠습니다. 소년은 그녀가 너무 걱정되어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소녀의 옆에서 그녀를 지켰습니다. 이불을 덮어주고, 음식을 해서 먹이고, 땀이 나면 닦아주고, 그녀가 최대한 편히 쉬어 나을 수 있도록 그녀 곁을 지켰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소녀는 점점 기운을 차렸고, 소년은 자신이 소녀에게 힘이 될 수 있음에 기뻤습니다. 소녀는 그녀를 계속 지켜주던 소년이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소녀는 소년에게 그가 해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해주고 싶었습니다. 소녀는 소년에게 자신이 했던 화려한 경험들을 자랑스럽게 얘기하며 그에게도 그것들을 해주겠다 말했습니다. 소년은 소녀와 그저 함께 있는 것이 행복하기 때문에, 좋은 곳에 가지 않아도 맛있는 것을 먹지 않아도 아무 상관없었지만, 소녀의 마음이 고마워 그것을 따랐습니다. 소녀는 그녀가 소중한 사람이 생기면 가보고 싶었던 사슴이 살고 있는 큰 연못이 있는 별장에, 진귀한 음식이 가득한 식당에, 그리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푸른 바다 해변에 소년을 데리고 갔습니다. 소년은 조금 주눅이 들기도 조금 낯설기도 했지만 괜찮았습니다. 소녀의 고마운 마음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이든 소녀와 함께라면 소년은 행복했기 때문입니다.


소녀가 살고 있는 집에는 커다란 정원이 있었습니다. 소녀는 그 정원에서 장미꽃을 기르며 키우는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소녀가 소년과 함께 이곳저곳을 다니느라 정원일에 조금 소홀해지자 하나 둘 시든 장미꽃이 생겨났습니다. 소녀의 아버지는 소녀를 불러 따끔하게 혼냈습니다. 소녀는 그래도 장미꽃을 기르는 것보다 소년과 함께 있는 것이 더 좋았습니다. 소녀는 아버지의 눈길을 피해 장미꽃이 시들지 않게 키우기만 하며 다시 소년과 많은 것을 함께 했습니다. 소년과 함께 있는 것이 소녀에겐 가장 큰 행복이었고 그만큼 소년에게 더 많이 의지하고 편하게 대했습니다.


소년은 소녀가 일하는 어려움을 매일 들어주며 소녀가 장미꽃을 잘 키울 수 있도록 조언도 해주고, 그녀가 잘 설 수 있도록 항상 그녀의 편에 있었습니다. 점점 소년의 얘기는 줄어들었고, 소녀의 얘기가 커져 갔습니다. 그래도 소년은 소녀의 얘기를 자신이 들어줄 수 있다는 것이 기뻤습니다. 어느 날 소녀는 꽃 관리하는 일을 잠시 멈춰 두고서, 소년을 데리고 자신이 가고 싶어 했던 하얀 꽃이 가득한 별장에 가자고 했습니다. 그곳에 가면 소년도 소녀도 모두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별장까지 가는 길은 꽤 먼 길이어서 소년과 소녀는 조금 지쳤습니다. 소년은 소녀에게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소녀는 화가 났습니다. 소년을 위해서 자신이 해야 하는 일도 잊고서 일부러 여기까지 왔는데 그 마음을 몰라주는 소년에게 화가 났습니다. 그들은 하얀 꽃이 가득한 별장에 도착했으나 꽃들은 이미 시들어 있었습니다. 소녀는 자신이 행복이라고 믿었던 것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순간 자신이 소년에게 빠져서 자신의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자신이 믿었던 행복도 쉽게 깨질 수 있다는 것에 당황했습니다. 소녀는 소년에게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 소녀의 표정은 차갑게 변해갔습니다. 소년은 갑작스러운 소녀의 변화에 어쩔 줄 몰랐습니다. 다시 소녀의 손을 잡고 소녀가 다치지 않게 꼭 안아주고 싶은데, 소녀는 소년을 버려둔 채 자신의 집으로 달려갔고, 소년은 소녀를 붙잡지 못했습니다. 소녀는 소년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지만, 자신이 다치는 것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소년은 소녀의 방에 찾아가 그녀의 굳은 표정을 보고 소녀의 상처를 달래주고 싶었습니다. 소년은 소녀를 꼭 안았습니다. 그의 마음이, 소녀를 향한 그의 사랑이 소녀에게 전해져 아프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소년의 온기에 소녀의 표정은 처음보다 조금 밝아졌습니다. 소녀는 소년에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내 방에 다시 오지 마. 너에 대한 확신이 사라졌어. 너와 함께 한 행복은 이렇게 순간 깨져버렸어." 소년은 소녀의 차가운 말에 가슴에 큰 상처가 났지만, 소녀와의 사랑을 지키고 싶은 마음으로 말했습니다. "행복은 깨진 게 아니야. 함께 만들어 가는 거야. 고통이나 아픔을 함께 하고 서로 지켜내지 못하는 사랑은 신기루에 불과해. 네가 힘이 들면 모든 걸 내게 기대. 널 위해서라면 난 하나도 힘들지 않아."


소년은 혼자 소년의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달빛이 그를 반겨주었지만 소년은 전처럼 즐겁지 않았습니다. 소년은 다친 소녀의 마음을 지켜주고 싶었습니다. 그는 달빛이 기른 분홍빛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 소녀의 집에 찾아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소녀는 문 밖으로 나왔습니다. 여전히 소녀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소녀의 말은 차가웠습니다. 소년은 소녀가 좋아하는 꽃을 주고 소녀를 꼭 안았습니다. "네 마음 다치게 해서 미안해. 네가 다치지 않게 더 널 지켜줄게." 소년이 말했습니다. "아니야. 이미 얘기했잖아. 이제 다시 우리 집으로 오지 마. 나는 다시 상처받지 않는 예전의 나로 돌아갈 거야." 소녀는 말했습니다. 소녀는 소년 때문에 변한 자신이 두려웠고, 실패를 하거나 상처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내가 네 집으로 갈게. 기다려." 소녀는 다시 그녀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래, 언제든지 와. 항상 널 기다리고 있을게." 소년은 이렇게 말하고는 쓸쓸히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너무도 갑자기 변한 소녀의 태도에 소년의 마음은 아프고 또 아팠습니다. 소년이 소녀를 사랑했던 크기만큼이나 커다란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소년은 소녀의 아픔과 상처를 위해 모든 걸 할 수 있었지만, 자신에게서 차갑고 멀어진 소녀의 마음에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며칠이 지나고 소녀는 소년의 방 앞에서 소년을 불렀습니다. 소녀는 잠시 소년의 노래를 듣고는 다시 소녀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소녀는 더 이상 소년에게 다정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소녀 스스로를 지키려던 차가운 말들은 날카로운 칼이 되어 소년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냈습니다. 소년은 소녀가 한번 따뜻하게 안아주며 위로해주면 그의 상처가 다 나을 것 같았지만, 소녀는 그저 다른 별장에 놀러 가자는 얘기를 할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며칠이 지나고, 열흘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소녀는 점점 소년을 찾지 않았습니다. 소년이 부르는 밤의 노래를 소녀는 이제 더 이상 듣지 않았습니다.


소년은 다시 혼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방에 있는 하얀 침대가 예전보다 차갑게 느껴졌습니다. 소년은 소녀를 그리워해 몇 번이나 찾아갔지만, 소녀는 잠시 차가운 얼굴을 보인 후 그녀의 집으로 돌아갈 뿐이었습니다. 더 이상 따뜻한 마음도, 소년을 향한 사랑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소녀는 상처받지 않는 자신의 집 안에서 다시 열심히 장미꽃을 키웠습니다.


혼자가 된 소년은 소녀를 만나기 전보다 더 외로워졌습니다. 소년의 가슴에 난 상처는 그를 더 어둠으로 이끌었습니다. 소년은 소년의 침대에서 잠을 자지 못했고 다시는 밤의 노래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다시 달빛과 함께 춤을 추지 않았습니다. 소년은 우두커니 창가에 서서 지나가는 어둠을 바라만 보았습니다. 소년은 별을 보고 싶었지만, 여전히 껌껌한 어둠의 하늘에서 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소년은 다시 혼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의 곁에 어느 누구도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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