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철학자가 됩니다(19)
나는 자기 중심적이지 않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인간은 다 그렇다. 똑같은 영화를 본다고 완전히 같은 감정을 느끼는 건 불가능하다. 물론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는 있다. 하지만 감정의 진폭이, 정도가, 깊이가, 무게가 다르다. 내가 느낀 감정은 당신이 느낄 수 없고, 당신의 감정도 내가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우린 자기 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기준은 항상 내 안에 있다.
나를 힘들게 만들었던 가족의 문제, 군대에서 겪었던 부조리, 배신 당한 사랑, 출산의 고통, 실패의 좌절과 같은 일들은 대부분의 사람이 겪게 된다. 문제는 이러한 일들을 우리는 비교급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저 사람이 겪은 일은 내가 겪은 일보다 가벼워. 혹은 저 사람이 겪은 일에 비하면 나에게 벌어진 일은 별 게 아니었구나. 비교할 수 있는 일도 있고 비교할 수 없는 일도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일은 비교가 가능하다. 특히 수치로 환산되는 모든 것은 비교할 수 있다.
나의 아버지는 세 번이나 바람을 폈어.
나의 어머니는 세 번이나 바람을 폈고, 결국 이혼을 했어.
네가 이겼네.
나는 애인과 결혼을 약속했지만 결국 헤어졌어.
나는 애인과 결혼을 약속했지만 결혼식 전날 헤어지기로 결정했어.
이것도 네가 이겼어. 그런데 말이야. 나의 아버지가 세 번째로 폈던 바람은 내 애인이었어.
비교와 우열은 다른 말이다. 숫자는 비교를 가능케하지만 우열까지 매기지는 못한다. 가령 1과 10은 분명 비교가 가능한 숫자다. 1보다 10이 큰 숫자니까. 하지만 성적을 매기면 달라진다. 1이 10보다 낫다. 반대로 점수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1점보다 10점이 높으니까.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우열이 가려진다.
인간은 모두 감정을 가지고 있다. 때때로 감정은 비교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감정을 측정하는 기준은 내 안에 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중심적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타인 중심적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것 역시 자기 중심적인 것이다. 타인을 중심으로 생각하려는 ‘자신만의 기준’을 세워둔 것이니까.
예술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술 감상은 나의 감정과 이해와 판단이 존재한다는 걸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 어떤 음악은 우리를 슬픔이라는 감정으로 내몬다. 슬프다는 감정이 발생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슬픔의 원인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충분히 울만한 일이라고 판단하게 된다. 감정과 이해와 판단은 순식간에 일어나고, 나는 결국 눈물을 흘리게 된다. 오롯이 나를 느낀다. 예술은 우리를 비교의 영역 밖으로 탈출시킨다. 우열은 없다. 그리고 한 가지를 깨닫게 된다. 나는 무언가를 느낀다. 그렇다면 타인도 무언가를 느끼는 존재다. 타인은 또 다른 나다. 그러니 타인은 나처럼 존중받아야 할 대상이다. 자기 중심적이던 인간이 세상 모든 인간을 ‘자신’인 듯 생각하게 된다. 그게 바로 예술의 환상성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