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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쌤 May 19. 2022

착한 바보가 되기

가끔은 철학자가 됩니다(18)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난 당신을 생각해요

당신이 떠나시던 그 밤에 이렇게 비가 왔어요

-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 중


비가 오면 나는 줄곧 이 노래를 흥얼거린다.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는 멜랑꼴리한 분위기에 빠지면 외로움은 배가 된다. '어제도 외로웠고, 앞으로 비오는 날은 죄다 외로울지도 몰라.' 이런 쓸데없는 생각(쓸데없는 생각으로 그치길 바란다)에 빠져 있다가 문득 이 가사에서 말하는 당신이 '우산'이라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비 오는 날 잃어버린 우산들이 떠오른 탓이다. 머피의 법칙이라는 말이 있다. 의도했던 일들이 뜻대로 풀리지 않고 계속 꼬여만 갈 때 쓰는 말이다. 비 오는 날, 우리는 머피의 법칙에 빠질 때가 많다.

비가 오는 날 우산이 없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는가. 우선 자신의 위치와 집의 거리를 가늠할 것이다. 빗방울의 굵기와 비를 맞고 가야 할 거리를 계산하고 나면 우산을 사야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답이 나온다. 다이소에서 판매하는 3천원짜리 우산을 구입하는 건, 참 망설여지는 일이다. 집에 우산이 몇 개나 있는지를 떠올리면 더더욱 그렇다.

우산이라는 사물은 비가 오면 100% 제 역할을 하지만 비가 오지 않으면 사용가치는 제로가 되고, 심지어 휴대가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사물로 바뀐다. 우산을 잃어버린 적 없는 사람과는 친구도 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우산을 잃어버리는 건 인간의 숭고하고 아름다운 실수 중 하나다. 내가 잃어버린 그 많은 우산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위의 노랫말 마지막에 "당신이 떠나시던 그 밤에 이렇게 비가 왔어요"는 그래서 더 애잔함을 불러일으킨다.


우산이라는 사물에는 좀 특이한 면이 있다. 빌려주거나 빌리거나 어느 쪽이건 간에 빚 갚듯이 꼭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느슨한 사물이라는 사실이다. 친구 집에 놀러 갔을 때 갑작스레 비가 오면 우산을 빌리게 된다. 물론 우산을 빌려주는 친구는 자신이 아끼는 것을 내어주기보다는 좀 허름한 것을 내어준다. 그러니 빌려줘도, 빌려와도 서로 주고 받을 뿐이지 다시 돌려주지 않는다. 모든 이의 집에는 이렇게 우산이 돌고 돈다. 거의 모든 이의 집에 타인의 손때가 묻은 우산이 적어도 하나씩은 존재한다. 우리는 사실 잠정적으로 선물을 주고 받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자본이 가지고 있는 최악의 성격은 바로 '주고 받는다give and take'는 교환의 법칙이다. 이러한 자본의 악마적 성격을 이겨내기 위한 방법으로 톨스토이는 '착한 바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조건 없는 선물, 그러니까 우리 중에 누군가 한 사람쯤은 계산을 덜 하거나 아예 하지 않는 바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산은 교환가치에 물들어 있는 오늘날, 조건 없는 선물로 기쁨을 선사해 주는 드문 사물이다.


'카리스마charisma'라는 말은 본래 '선물'을 의미한다. '신의 은총'이라고 번역되어지는 성경 속 단어가 바로 카리스마(그리스어로는 카리스charis), 선물을 성스럽게 번역한 말이다. 초대 교회와 바울은 사도들이 가진 치료와 예언, 성령의 능력 등을 카리스마라 불렀다.

현대인에게 필요한 카리스마는 무엇일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주고 받는다'라는 교환의 법칙을 깨고 '착한 바보'의 카리스마를 갖는 것. 누군가는 조건 없이 베풀어야 하고, 조건 없이 선물해야 한다. 가장 아끼는 우산은 내어주지 못하겠지만 낡은 우산, 고장이 좀 나기는 했지만 지금 당장 비를 피할 수는 있는 그런 우산을 내어줄 수는 있지 않을까. 그게 공공의 선을 위한 한 걸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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