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레벌레가 쌓여 삶을 이룬다
어느 늦여름, 영화 중경삼림을 보았다.
그리고 한동안 금붕어와 비행기와 여름과 파인애플 통조림에 매료되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홍콩풍의 엽서랑 패브릭 포스터를 찾아보고 금붕어 키우기 어항 세트 가격 따위를 알아보고 있었다. 덕질과 같은 느낌이었던 것 같다. 현재만을 살아가는 것 같은 홍콩영화의 감성이 너무너무 좋았다.
그러던 중 인터넷으로 관심이 있는 대학원들을 검색하다가 어떤 교수님을 찾아냈다. 홍콩과기대에서 박사를 받으시고 미국에서 교수를 하시는 분이셨다. 교수님의 홈페이지에 올라온 영상의 홍콩식 억양을 듣고 중경삼림 생각이 났고, 연구 핏도 안 맞는 주제에 이 대학원에 지원하기로 했다.
연구분야가 달라 sop를 새로 써서 내면서도 석사도 안했고 그 연구실과 연관된 전공 과목의 학점도 낮고 분야도 다른데 날 과연 뽑아줄까 고민했다.
당연하게도 날 뽑지 않으셨다. 그러나 이 학교의 다른 교수님께서 수많은 지원서 중 어떻게 날 찾아내셨고 먼저 연락을 해주셨다. 결국 난 합격통지서를 받을 수 있었다.
그야말로 얼레벌레 대학원에 가게 된 상황이다.
진학에 앞서 고민도 조금 했다. 진학하게 된 연구실은 내가 해오던 연구와 유사점은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내가 하고 싶어하던 연구랑은 차이가 있었다. 뉴욕 쪽에 있는 순위가 더 높은 곳도 붙었는데, 오히려 그쪽 연구실이 더 내 연구 핏과 잘 맞았다.
그러나 교수님과 인터뷰를 하며, 이 대학의 교수님이 더 열정적이시고 아이디어가 많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뉴욕 쪽 교수님은 약간 안분지족하는 느낌이었다. 고민 끝에 그래도 5년간의 박사과정인 만큼, 내가 함께할 사람들에 더 큰 비중을 더 두기로 했다. 무엇보다 나는 그 다른 학교에 다니는 내가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냥 감이다.
박사과정은 고되다는데, 어쩌면 이 결정을 나중에 후회하려나? 그럼 그냥 이곳에 끌렸던 지금의 날 떠올렸으면 좋겠다. 지나간 과거에 매몰되지 말고,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 잘 해왔듯 잘 할 수 있을 거야.
미국 시골의 평범한 플래그십 주립대. 홍콩과는 전혀 관련이 없어보이는 곳이지만, 날 여기로 이끈 건 홍콩 덕질과 중경삼림이었다는 게 재미있는 것 같다.
틀린 길은 없다. 우리는 시간을 소비하는 존재이고, 나의 시간에 무엇을 채울지에 대한 고민만 있을 뿐이다.
운명을 믿진 않지만, 어떤 길을 가든 먼 훗날 과거 내 모든 선택이 운명이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생길 것임을 안다. 늘 그래왔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