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망이자 두려움
순수하게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 우리는 홀로 여행을 떠난다. 또는 서로 시간이 맞지 않거나 취향이 너무 달라서 적당한 동행을 구하지 못했을 때도 홀로 여행을 선택한다. 많은 사람들이 가장 겁내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장 하고 싶어 하는 여행이 홀로 여행이다. 로망이자 두려움. 이 상반된 감정이 곧 홀로 여행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로망을 실현한다면 가장 행복한 여행이 되겠지만 두려움에 시달린다면 가장 힘든 여행이 되겠다. 나로서는 단점보다는 장점에 높은 점수를 준다. 내가 여행하는 이유 중 많은 부분이 홀로 여행의 장점과 겹친다. 동행 여행을 여러 번 해보았다면 홀로 여행에 도전해 보시라. 아마 이전과는 다른 신세계가 열릴 것이다.
이것이 홀로 여행의 최대 장점이다. 남을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 이리도 편할 수가 없다. 누군가를 배려하지 않아도 되고 누군가에게 양보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무엇을 해도 상관없다. 오후 2시까지 늦잠을 자든 종일 공원에서만 서성이든 뭐라 할 사람이 없다. 나는 오직 나만 보면 된다. 완벽한 자유다.
남편과 둘이 간 필리핀 여행. 처음 1주일은 둘이 함께 남쪽 섬 팔라완에 있다가 남편은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나는 열흘 동안 혼자서 북부지역의 바기오와 사가다를 여행했다. 결론은 동행여행과 홀로여행의 비교체험이었다. 여행 가기 전부터 남편의 요구와 내 조건을 맞추느라 머리가 복잡했다. 예를 들면 남편은 무조건 수영장이 딸린 숙소를, 나는 정해 놓은 예산에 맞는 숙소를 원했다. 수영장이 있으면서도 비싸지 않은, 그리고 쾌적한 숙소를 검색하는 일은 곧 눈알이 빠질 지경이었다는 뜻이다. 아무거나 잘 먹는 나와는 달리 남편은 짜고 기름진 필리핀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니 식사 때마다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흥정하기 싫어하는 남편은 트라이시클을 탈 때마다 기사가 부르는 대로 다 주려고 해서 나는 그걸 매번 뜯어말려야 했다.
그러다 혼자가 되니 심신이 얼마나 가볍던지! 숙소도 음식도 흥정도 다 내 마음대로다. 누군가를 배려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낯설고도 신선했다. 아들이 대학 간 이후 처음으로 시도한 홀로 여행이었다. 한편 둘이서 알콩달콩 옥신각신하는 재미가 없으니 확실히 외롭기는 했다. 특히 혼자서 밥을 먹을 때가 가장 어색하고도 쓸쓸했다. 하지만 혼자만의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었기에 두려움과 외로움을 감수할 만했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이라는 중력으로부터 벗어나면 한결 자유롭게 나를 탐구할 수 있다. 내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정확히 파악하게 된다. 그러면서 나도 몰랐던 나를 발견한다. 동행이 있었다면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라 해도) 우리는 조금씩 가면을 쓸 수밖에 없다. 좀 더 근사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좋아도 싫은 척, 싫어도 좋은 척. 혼자일 때 우리는 비로소 가면을 벗는다. 벌거벗은 자신을 온전히 들여다보는 시간은 혼자일 때만이 가능하다.
혼자 여행을 가면 줄곧 혼자서만 지낼 거라고 생각한다. 절반만 진실이다. 사람들 만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야 그렇겠지만. 오히려 홀로 여행자가 일행이 있는 여행자보다 많은 친구를 사귈 수 있다. 사람 심리가 그렇다. 동행이 있는 사람보다 혼자인 사람에게 더 마음을 열게 된다. 여행자 역시 눈치 봐야 할 일행이 없으므로 마음껏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특히 같은 처지인 홀로 여행자들끼리는 금방 일행이 되고 친구가 된다.
혼자 갔던 베트남 여행에서는 날마다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었다. 숙소 주인과 직원, 같은 숙소에 묵었던 여행자들, 길에서 만난 현지인들. 친구와 둘이 갔던 대만 여행은 완전 반대였다. 친구와 함께 하는 시간은 재미났지만 그러느라 한 명의 외국인 친구도 사귀지 못했다. 우리 세 식구가 같이 갔던 일본여행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늘 셋이 다니니 여느 때처럼 다른 여행자나 현지인을 만날 기회가 없었다.
남자는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여자는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샤워를 하고 난 뒤 남녀의 차이. 남자라면 대부분 거울을 들여다보며 이렇게 말한다.
“음, 괜찮네. 이만하면 잘생겼어, 아직 쓸 만해!”
반면 여자는 거의 다음처럼 말한다.
“어휴~ 피부가 왜 이리 칙칙해? 이 뱃살은 또 어쩔 거야!”
여자들은 자신에게 높은 평가 기준을 들이댄다. 더 예뻐야 하고 더 날씬해야 하고, 아직 멀었다고 생각한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하라고 외쳐봐야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는 걸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홀로 여행은 이런 여자들에게 약효 좋은 처방전이 된다. 몇 시간을 헤맬지라도 혼자서 길을 찾는다. 낯설지만 혼자서 밥을 주문하고 먹어본다. 말이 안 통하면 괴발개발 그림을 그리든가 손짓 발짓을 해서라도 의사소통을 시도한다. 이런 여행을 한 번이라도 해본다면 집으로 돌아갈 즈음에는 자신감이 빵빵하게 충전될 게다. 실제로 지금까지 혼자서 씩씩하게 여행을 다니는 여자들을 정말 많이 만났다. 내가 만난 홀로 여행자 중에는 남자보다 여자가 훨씬 많았다. 외모로 인한 자신감은 세월 따라 사라지겠지만 여행으로 인한 자신감은 자존감으로 발전한다.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을 가장 ‘두려워’한다. 혼자라는 데서 오는 불안감. 혹시 험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 무슨 사고가 나면 어쩌지? 혼자서 아무 데도 못 찾고 헤매기만 하면 어쩌지? 혼자 다니면 남들이 나만 쳐다보지 않을까? 동행이 있으면 괜히 든든하고 마음이 놓인다. 아무래도 홀로 여행이 더 두려운 건 사실이다. 나도 그렇다. 여행 구력이 10년이 넘었지만 낯선 도시에 홀로 떨어지는 순간마다 두려움이 찾아온다.
석 달 유럽여행의 첫 목적지인 스페인 마드리드, 비행기에서 내리니 밤 12시가 넘었다. 밖에는 하필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공항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예약한 숙소를 찾아갔다. 과묵한 택시기사는 숙소에 나를 내려주고 짐도 옮겨다 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체크인을 하고 나서까지 돌아가지를 않는다. 그는 매우 난처한 표정으로 서 있었고, 나 역시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숙소 직원이 말했다.
“이 분이 택시비를 달라고 하는데요?”
오 마이 갓! 나는 그만 택시비 주는 걸 깜빡한 것이다. 영어를 못하는 그로서는 얼마나 난감하고 답답했을까! 그날 밤 나는 다섯 번쯤은 “I’m so sorry!”를 외쳤다. 혼자서 시작하는 긴 여행의 첫날, 알게 모르게 깔린 두려움은 그런 식으로 나타났다. 긴장과 더불어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는 걸로.
두려움에 대처하는 자세는 두 가지다. 먼저 두려움이란 감정을 인정한다. 홀로 여행이란 일종의 세트메뉴다. 먹고 싶은 주메뉴(홀로 여행의 장점들) 외에 원하지 않는 보조 메뉴, 두려움까지 딸려온다. 다행인 건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것. 모든 여행자들이 낯선 나라, 낯선 도시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두려운 게 당연해’라고 받아들이면 오히려 한결 편해진다.
그 다음은 ‘왜 두려운 거지?’라고 물어본다. 구체적으로 무엇 때문에 두려운지 짚어보자. 이유가 파악되었으면 대비책을 세우면 된다. 보통은 안전문제가 가장 큰 이유다. 기본적인 안전을 위해서는 기본적인 수칙을 지키면 된다. 특정 위험지역을 미리 체크하고 가지 않는다. 늦은 밤 골목길을 돌아다니지 않는다. 지나치게 술에 취하지 않는다. 이 정도만 지켜도 큰 위험은 없다. 또한 여행지에서 소매치기나 강도를 만났을 때, 여권이나 신용카드를 잃어버렸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알아둔다(뒤에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보겠다). 두려움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지만 여행 경험이 늘어갈수록 그 농도는 점점 옅어진다.
두려움 혼자 오면 심심할까 봐 함께 따라오는 것은 외로움이다. 아무리 혼밥, 혼술이 유행이라지만 막상 홀로여행을 가려고 하면 망설이게 된다. 과연 혼자 가서 재미가 있을까? 혼자 밥 먹고 혼자 돌아다니는 거 너무 쓸쓸하지 않을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독일 베를린, 시내 관광지인 전승기념탑에 가는 길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지하도를 빙빙 돌아가면 탑이 나오는데 길이 조금 복잡했다. 그나마 갈 때는 무리 없이 찾아갔는데 나올 때가 문제였다. 지하도를 돌아 밖으로 나오면 버스정거장이 보여야 하는데 자꾸 엉뚱한 길로 나왔다. 몇 번을 반복해도 마찬가지. 머릿속에서는 ‘길을 왜 이따위로 만들어 놓은 거야?’와 ‘나는 왜 갔던 길조차 그대로 나오지 못하는 걸까?’가 도돌이표처럼 떠올랐다. 워낙 길치라 매번 헤매기 일쑤지만 이때는 정말 외로웠다. 길치인 자신에게 화가 나기보다는 ‘외롭다’라는 감정이 밀려왔다. 누구랑 같이 왔으면 이리 오랫동안 멍청하게 헤매지는 않았을 텐데. 둘이 헤매면 그래도 재미라도 있지. 구시렁구시렁.
외로움에 대처하는 자세도 두려움과 다르지 않다. 일단은 인정하기. 꽁냥꽁냥 둘이 다니는 여행보다는 외로울 수밖에 없다. 여행뿐만 아니라 인생에서 외로움은 늘 우리를 따라다닌다. 결혼을 해도 외롭고 안 해도 외롭고, 자식이 있어도 외롭고 없어도 외롭다. 그러나 마음이 맞지 않는 두 사람이 같이 다니는 여행이 홀로여행보다 열 배는 더 외롭고 괴롭기까지 하다면 위로가 될까? 게다가 외로움을 감수하는 대신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으니 손해만 보는 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