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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다로운, 동행여행

누구랑 갈까?

by 소율

여행이란 당연히 동행과 함께해야 한다는 (근거 없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다. 오래전부터 고대했던 여행임에도 동행자가 갑자기 못 가게 된다면 여행 자체를 포기하기도 한다. 혼자 가느니 차라리 가지 않겠다는 결정. 그만큼 ‘홀로 여행’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는 반증이다. 그러나 외려 홀로 여행보다 동행 여행이 만만하지 않다. 제목에 ‘까다로운’이라는 단서를 붙였다. 그만큼 고려해야 할 사항이 많다는 뜻이다. 사이좋게 웃으면서 떠났지만 돌아올 때는 따로 들어오는 경우, 여행 가기 전에는 베스트 프렌드였지만 다녀와서는 얼굴도 안 보는 사이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오로지 즐거움만을 기대했던 여행이 잔혹동화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하지 마라’ 항목 두 가지와 ‘해라’ 항목 한 가지를 제시하겠다.



하지 마라, 독박여행


혹 ‘독박 육아’라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아무도 도와주는 이 없이 혼자서 육아의 모든 책임을 도맡는 것을 일컫는 신조어다. 대부분 엄마가 독박 육아를 하게 된다. 20여 년 전의 나 역시 독박 육아를 했다. 그때는 독박 육아라는 말도 없었고, 엄마만의 육아를 당연시하는 분위기였다.


‘독박여행’도 같은 개념이다. 한 사람이 여행에 대한 모든 역할과 책임을 떠맡는 것, 한 사람이 여행 준비와 진행을 모두 담당하는 것이다. 부모가 함께 해야 할 육아를 혼자서 감당하면 힘들고 외롭듯이 여행도 마찬가지다. 뭐든 ‘독박 쓰는’ 것은 억울하다.


나의 첫 번째 태국여행이 독박여행이었다. 남편과 아이와 함께 하는 가족여행이었지만 준비는 나 혼자 도맡았다. 비행기 표와 숙소를 예약하고 짧은 3박 5일 동안 무얼 하면 좋을까 궁리하느라 바빴다. 여행지에서는 계획한 대로 하루하루 일정을 진행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편하게 따라만 다니는 남편은 뜨뜻미지근한 반응이었다. 신이 난 아내와 아들만큼 즐거워 보이지가 않았다.


경희 씨는 나와 반대였다. 늘 남편이 여행 준비를 하고 그녀는 따라가는 입장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매번 남편이 인도하는 대로 쫓아다녔다. 그런데 이상하게 별 재미도 못 느끼고 다녀와서도 어딜 갔다 왔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경희 씨 같은 경험을 나도 딱 한 번 한 적이 있다. 방학이라 집에 온 아들과 함께 갑자기 일본 교토로 가족 여행을 가게 되었다. 예정에 없던 여행이라 모든 준비를 아들에게 맡겨 버렸다. 아들은 가이드처럼 엄마 아빠를 데리고 다녔다.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이 아들이 이끄는 대로 관광지를 찾아가고 소문난 맛집에서 밥을 먹었다. 패키지여행이 이런 느낌일까 싶게 편하긴 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다지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여행이 밍밍했다. 나중에 돌이켜 보니 어딜 가서 무얼 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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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마라, 모시는 여행


“이건 뭐지? 부모님을 모시고 가는 여행인가?” 노노노! 부모님을 모시는 여행이야 당연히 부모님께 맞춰 드리는 여행이니 해라, 마라 할 이유가 없다. ‘모시는’ 여행은 독박여행의 상위 버전이다. 독박을 쓰다 못해 아예 모시고 다니게 된다. 혼자서 준비를 하는 건 물론이요, 하인이 양반 모시듯 하게 되는 여행. 누구랑 가는데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 걸까? 답은 바로 사춘기 자녀와 함께 여행할 때, 특히 원하지 않는 아이를 억지로 데려갈 경우 자칫하면 ‘모시는’ 여행이 되기 쉽다.


싱글인 은영 씨. 그녀는 초등 6학년인 여자 조카를 데리고 유럽여행을 떠났다. 사춘기가 시작되는 여자아이들은 유독 까탈스럽게 구는 경향이 있다. 한여름 더위에 아이는 쉽게 짜증을 내고 정식 레스토랑이 아니면 음식을 먹지도 않았다. 평소에는 귀엽기만 한 조카였지만 이렇게 까다로울 줄이야, 내 자식이 아니니 매번 야단을 칠 수도 없는 일. 아이 비위를 맞추며 여행을 하느라 그녀는 진땀을 흘려야 했다.


여름방학 때 고등학생 딸과 함께 유럽을 여행한 수지 씨. 아이는 이미 친구들과 함께 하는 나름대로의 방학 계획을 세워 놓았다. 엄마와의 여행은 아이가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딸에게 좋은 경험이 되리라는 욕심에 강제 반 설득 반 아이를 데려갔다. 아이는 숙소에서는 TV만 들여다보고 밖에서는 휴대폰에 머리를 박고 다녔다. 아무리 멋진 성과 근사한 박물관을 가도 불평만 했다. 그렇다고 집에서처럼 대놓고 싸우다가는 여행을 완전히 망쳐 버릴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엄마는 날마다 ‘참을 인忍’을 새겨야 했다. 상전도 그런 상전이 없었다.



여행의 3단계


독박여행과 모시는 여행에서, 준비하는 사람이 힘든데 비해 동행자의 만족도가 낮은 데는 이유가 있다. 흔히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출발하는 데서부터 여행이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엄밀히 말하면 여행은 공항에 가기 전부터 시작된다. 누구랑 갈지 어디로 갈지 생각하는 것부터 여행의 시작이다. 즉 준비단계가 이미 여행의 1단계다. 공항을 출발해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기까지가 2단계, 돌아온 뒤 여행을 정리하고 추억하는 것이 3단계. 여행은 이렇게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누구랑 어디를 갈지 결정하고, 비행기 표와 숙소를 예약하고, 그 도시는 어떤 곳인지 알아보는 과정을 하나하나 하다 보면 이번 여행이 어떻게 흘러갈지 파악할 수 있다. 여행의 구체적인 부분과 전체적인 모습이 그려진다. 나무와 숲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시각이 키워지는 것이다. 한편 아무리 계획을 잘 세웠어도 늘 변수가 생기는 게 여행이다. 준비과정인 1단계를 밟으면 이런 돌발 상황에 대처할 힘이 생긴다.


세상 이치가 그러하듯 기초를 건너뛰면 곧 문제에 부딪치기 마련이다. 준비 없이 막바로 여행에 뛰어들면 변수가 생겼을 때 유연하게 대처하기 힘들다.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상황 속에서 당황하게 되고 짜증이 난다. 게다가 적극적으로 준비한 사람보다 소극적으로 물러나 있는 사람이 더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준비과정에 함께 하지 않은 채 그저 따라다니는 사람들은 불평불만이 많고 만족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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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는 여행을 해라


독박여행과 모시는 여행의 대안으로 나누는 여행을 권한다. 혹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에게 먹을 것이나 학용품을 나누어주라는 건가?’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아니다. ‘나누는’ 여행이란 여행의 준비와 역할을 나누라는 의미다. 최대한 같이 여행하는 동행 모두를 준비에 참여시키고 의견을 반영하는 방식이다. 나누는 여행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최선은 다 같이 모여서 의논하는 것. 동행 모두가 한 자리에 모여 하나하나 의논해서 결정을 한다. 숙소에서 루트, 음식과 쇼핑까지 모두의 의견을 조율한다. 가장 권장하는 방법이다. 간혹 내 취향과 다른 결정이 내려지더라도 서로 합의하고 동의한 일이므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둘째, 각자 자신이 관심 있는 부분만 맡아서 준비를 할 것. 동행인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이기가 불가능할 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다. 차선이 되겠다. 온 가족이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여행에서 잠자리를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엄마는 쾌적하고 편리한 숙소를 알아보고 예약을 한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아빠는 둘러볼 유적지를 조사하고 찾아가는 방법을 알아본다. 음식을 좋아하는 큰아이는 여행지에서 무엇을 먹을지, 어느 맛집에 갈지를 조사한다. 탈 것 마니아인 작은아이는 여행지에서 이용할 버스, 전철, 기차, 트램, 뚝뚝, 썽태우, 지프니, 릭샤 등 교통수단을 찾아본다. 이렇게 자신이 맡은 분야만 확실히 준비해도 여행은 얼마든지 즐거워진다.


셋째, 여행지에서 역할을 나누는 것. 최선은 물론이고 차선도 선택할 수 없을 때, 우리에게는 삼선이 있다. 도저히 나눠서 준비할 상황이 못 되면 한 사람이 준비를 도맡을 수밖에 없다. 그럴 때는 이 방법이 적절하다.


친구와 대만을 갔을 때의 일이다. 자유여행을 준비해본 적이 없는 친구라서 모든 여행 준비는 내가 맡았다. 대신 여행 중 돈 관리와 길 찾기는 친구가 전담했다. 돈을 내고 거스름돈을 챙기고 영수증을 관리해 주니 나로서는 얼마나 편하던지. 나는 길치인데 반해 이 친구는 공간 감각이 뛰어나 한 번에 길을 척척 찾았다. 첫날 그 능력을 눈치챈 나는 목적지를 찾아갈 때마다 친구를 앞세웠다. 이렇게 역할을 나누면 동행자도 적극적으로 여행에 참여하게 된다. 간혹 한쪽이 실수를 하더라도 불평하기보다는 너그럽게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이 맡은 부분에서도 얼마든지 실수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혼자서 준비를 열심히 한다고 능사가 아니다. 동행여행의 핵심은 가능한 한도 내에서 동행자 모두를 조금씩이라도 주도적으로 참여시키는 것이다. 수동적인 방관자를 능동적인 참여자로 이끌어 내는 것이 동행여행의 성공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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