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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율 Jan 27. 2021

마마보이도 아니고 불효자도 아니랍니다

자식에겐 자식 인생을, 당신에겐 당신 인생을

   

 벌써 스물여섯이라니. 어른이 되어버린 아들이 기특하면서도 한편으론 아쉽다. 가는 세월을 어찌 막으랴만 조금 천천히 자랐어도 좋았을 것을. 오랜만에 세 식구가 모인 아들의 생일날, 특별할 건 없었다. 아침에 미역국을 끓였고 저녁엔 케이크를 잘랐다. 소고기를 듬뿍 넣은 미역국을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케이크도 입맛에 맞는다고 두 조각을 먹었다. 자식이 잘 먹으면 엄마는 호랑이 기운이 나는 법이지.


 


엄마에게 자식이란 복잡한 의미를 지닌다. 마냥 이쁘고 귀하기만 한 존재는 아니다. 솔직하게 ‘애증의 대상’ 혹은 원색적으로 ‘웬수’라고 표현하는 엄마들도 적지 않다. 대대로 ‘어머니’란 단어는 마치 ‘희생의 대명사’처럼 알려지고 찬양되었다. 그러나 자식에게 무조건 희생하고 사랑만 퍼주는 엄마는 (바람직하지도 않거니와) 명절이면 틀어대는 TV에서나 등장할 뿐, 실제로 그리 흔하지 않다. 모든 자식을 똑같이 고루 사랑하는 엄마도 가뭄에 콩 나듯 드물다. ‘평등하게 사랑을 나눠주기’란 도달하기 힘든 대단한 경지이기 때문이다. 대개 자신의 편애를 알면서도 모른 척하거나 굳이 알고 싶지 않아서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 엄마만 보아도 나에겐 평생 무관심으로 일관했고, 돌아가시는 날까지 달라질 것 같지 않다. 반면 장남과 장녀에 대한 사랑은 차고도 넘친다. 열 손가락 깨물어 덜 아픈 손가락도 있고 심지어 안 아픈 손가락도 있는 것이다. 그게 현실이다. 내 나이 오십 중반, 엄마라는 존재도 그저 약하고 평범한 인간이란 걸 깨달은 지 오래. 이젠 우리 엄마의 처사가 별로 서럽지 않다. 원망하기에는 이미 많이 늙으셨다. 사그라드는 노인은 원망을 받을 여력이 없다. 없는 집의 자식 다섯은 부모님의 (정신적, 물질적) 능력치를 넘어서는 숫자였다. 어쩔 수 없었으리라. 넷째로 태어난 내가 운이 나빴다고 할밖에.


 한편 사랑을 듬뿍 받은 언니보다, 나에게 엄마가 덜 애틋한 것 또한 부정하지 않겠다. 아무래도 받은 만큼 가는 게 아닐까. 물론 그게 누구에게나 정답은 아니다. 아무리 많이 받았어도 내놓을 줄 모르는 자식이 있고 받지 못했는데도 선뜻 내놓는 자식이 있으니까. 교과서처럼 받은 만큼 잘하는 언니가 있어 늘 고맙고 다행이다. 나는 언니 옆에 붙어 손을 보탠다. 무리하지 않고 마음이 가는 만큼만. 전적으로 언니 덕분이다. 처음엔 불공평한 것 같으면서도 이런 식으로 얼추 균형이 맞춰진다. 인생은 오묘하달까.


  많은 형제자매 틈에서 오히려 외롭게 자란 나는 자식을 하나만 낳았다. 둘도 많았다. 내가 받지 못했던 관심과 애정을 적어도 한 아이에게만큼 온전히 주고 싶었다. 어느 정도 성공인 것 같다. 최고를 주지는 못했어도 최선을 다할 순 있었으니. 내 깜냥으로는 역시 하나가 적당했다. 신의 한 수였지.


 대학 4년 반에 군대 2년까지 7년 만에 집에 돌아왔으니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남수단 파병에서 귀국할 날만 손꼽아 기다렸는데 돌아온 지 두 달째. 수년간 혼밥을 하다가 하루 세끼를 같이 먹는 것만으로도 생기가 돈다. 집안일을 같이 하고, 컴퓨터의 자잘한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도 이렇게 편할 수가. 아들이 없었던 7년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네? 대학을 가던 해 ‘육아 졸업이다!’를 외치며 그때도 분명 신났었는데? 돌봐야 할 아이가 아니라 이제는 엄마를 도와주는 성인 이어서일까. 아니다. 어릴 때는 어려서 사랑스럽고 지금은 큰 대로 믿음직하다. 이유 불문, 비가 오면 우산 장수가 좋고 해 뜨면 짚신 장수가 좋은 것이로세.


 내가 우리 부모님과 별 접점 없이 자란 것과 다르게 아들과는 결이 잘 맞았다. 간단히 말해 사이가 좋은 편이다. 이럴 때 꼭 날아오는 질문이 있다. “그럼 마마보이 아니에요?” 심지어 “아들이 여자 친구 생기면 싫으시겠네요?”라는 말도 들었다. 도대체 말이야 방구야? 부모에게도 냉철하고 논리적인 잣대를 서슴없이 들이대는 성향인데 무슨 마마보이? 게다가 아들이 연애하는데 내가 싫을 건 뭐고, 좋을 건 또 뭘까? 지 인생인데? (그동안 여자 친구는 여러 번 생겼다 없어졌다) 뜻밖에 젊은 청년들(혹시 젊은 꼰대?)이 저런 말을 해서 무척 황당했다.


 사람들은 엄마와 아들의 관계를 마마보이 아니면 불효자, 둘 중의 하나만 떠올린다. 이분법에 익숙하다. 마마보이도 불효자도 아닌, ‘그 밖의 건전한’ 모자 관계를 감히 상상하지 못한다. 딸의 경우는 또 다른데 모녀 사이가 돈독하면 보통 주변의 부러움을 산다. 마마걸이라고 단정 짓는 시선은 별로 없다. 유독 엄마와 아들의 관계에 민감한 것을 나는 충분히 이해한다. 오직 아들을 통해서만 엄마의 존재를 인정받던 분위기가 오랫동안 계속되었으니까. 애지중지 키운 아들을 엄마 입맛대로 움켜쥐거나, 그게 실패하면 불효자로 전락하는 것이다.


 요즘 ‘며느라기’라는 드라마가 화제인 걸 보면 우리는 아직도 가부장적 봉건사회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결혼 후 나 역시 억눌린 가족관계 속에서 긴 세월 고통받았다. 거의 매일 ‘아침 드라마’를 찍었다. 같은 배역을 누군가에게 물려주지는 않을 것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자식에게 향하는 눈길을 자신에게로 돌리기. 아직도 우리에겐 살아가야 할 날들이 많으며, 그래서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 역시 많으니까.


“자식에겐 자식 인생을,

당신에겐 당신 인생을,

허. 하. 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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