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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율 Feb 11. 2021

명절에서 해방된 여자와 남자

중립지대에 선 부부


잠이 깼다. 눈가에 아직 잠 기운이 남아있다. 바로 일어나는 모범생 스타일은 아니라서. 조금 뒹굴거렸다. 뻑뻑한 눈이 조금씩 풀린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베개와 이불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부엌으로 나갔다. 식탁에는 남편이 먹은 흔적이 가득했다. 바나나와 찐 고구마 껍질, 과자 부스러기, 커피 믹스가 말라붙은 머그잔. 알아서 먹는 건 좋은데 치우는 것까지 바라면 지나친 욕심(인가, 이겠지)?


남편이 스스로 아침밥을 먹도록 훈련시키는데 약 5년이 걸렸다. 결혼하고 15년까지는 당연히 내가 차려주었다. 그런데 유방암을 겪으며 지독한 불면증이 따라왔다. 아침 일찍 일어날 수 없는 체질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아침밥을 차려줄 수 없다고 선언했다. 혼자 먹고 가라고. 대신 간단히 먹을 수 있는 빵, 떡, 과일 등을 준비해주었다. 그는 5년가량 (드러내거나 드러내지 않는 짜증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평생 엄마와 아내가 챙겨주는 아침상이 당연했던, 전형적인 한국 남자는 몸에 밴 습관을 좀처럼 벗어버리지 못했다.


나 역시 굴하지 않았다. 아침잠은 당장 내 건강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남편 기분을 맞추자고 건강을 또 포기할 수는 없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면, 그건 우연이 아니라 고의가 된다. 내가 나에게 가하는 발길질인 것이다. 나는 몰래 한숨을 내쉬며 그저 버티었다. 드디어 그가 적응하기 시작했다.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아무런 동요 없이 아침밥을 챙겨 먹게 된 것이다. 밥, 국, 반찬으로 구성된 한식이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던 그가 떡이든 과일이든 군말 없이 먹는 경지에 이르렀다, 단 평일에 한해서. 주말엔 혼자 일어나 빵, 과일, 과자 등을 잔뜩 먹고 나서 꼭 물어본다. ‘그런데 밥은 언제 먹냐?’ 아직 물방울의 힘이 부족한 게야. 한편 먹고 나면 치워야 한다는 걸 가르치려면 또 몇 년이 걸리려나. 앓느니 죽지, 그건 내 쪽에서 포기한다.


그는 일찌감치 산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명절 전날에 친구를 만나는 건 수십 년간 계속되어온 일과였다. 오늘은 친구와 등산을 하고 밤에 자기 부모님 댁에 갈 것이다. 거기서 하룻밤 자고 내일 아침에 아들이 할아버지 댁에 오면 저녁에 함께 돌아올 것이다. 큰 며느리인 나는? 안 간다. 유방암 환자가 되고 나서 ‘며느리를 그만뒀다.’ 나도 오랫동안 지옥 같은 명절을 보냈었다. 어디 명절뿐인가. 명절보다 새털처럼 많은 다른 날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라떼’를 외치는 꼰대 같지만 요즘 ‘며느라기’에 등장하는 상황쯤은 껌이라고나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본질이 같은 ‘며느라기’를 보면서 가슴이 아팠다, 아직도 변한 게 없다니!) 인생 좀 살아보면 현실이 영화나 드라마보다 끔찍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며느리 사퇴’는 건강과 맞바꾼 비장의 한 패였다.


그때부터 나는 남편에게도 사위 노릇을 요구하지 않았다. 며느리 노릇에 비해 사위 노릇이랄 게 뭐 있을까마는. 장모님이 차려주는 밥을 맛있게 먹어주는 역할 정도? 어쨌든 나도 그에게 똑같은 자유를 선물했다. 명절이고 생신이고 평일이고 사위로서 해야 할 의무는 전혀 없다. 처가에 안 가도 상관없다. 처가 식구 중 누구도 눈치 주지 않는다. 각자 자기 부모님은 자기가 챙길 것. 효도는 셀프, 그게 전부다.

 


결국 우리는 명절에서 해방된 여자와 남자가 되었다. 25년을 거쳐 어렵게 만든 중립 지대. 어쩌면 38선 같은 휴전선 일지 모르겠다. 보다시피 부상을 피할 순 없었고 흉터는 평생 남을 터. 언젠가 이 휴전이 완벽한 종전이 될 수 있을까? 결코 자랑할 만한 결혼생활은 아니지만 편안해진 건 확실하다. 오늘 나는 느지막이 일어나 토스트를 먹고 글을 쓴다. 내일 아침엔 산책을 할 것이다. 명절 당일에 한가한 산길을 혼자 걸으면 살짝 행복해지니까. 요즘 말로 꿀이다, 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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