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하지 않은 손님 덕분에

봄이라니요!

by 소율


어리둥절할 지경이다, 며칠 전부터 갑자기 날이 따뜻해졌다. 한낮의 기온이 영상 10도까지 올라가고 그 귀하신 몸, 태양이 종일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바람이 확연히 약해졌다. 아, 이게 과연 제주의 봄이런가? 진정 봄이 온 것인가? 이러다가 내일이라도 초속 10미터 강풍에 눈보라가 몰아치는 건 아냐? 그건 아닐 모양이다. 주간 예보를 보면 계속 10도 이상의 날씨가 이어진단다.


그저께는 바람이 거의 없고 해가 쨍쨍해서 난 기가 살았다. 아침부터 구좌읍 곳곳을 바람난 듯 날아다녔다. 덕분에 조금 남아있던 모닝의 주유 칸에 빨간불이 들어왔네. 다음에 나갈 땐 모닝 양에게 밥부터 먹여야겠다.


도서관에서 문자가 왔더랬다. 예약 도서를 찾아가란다. 기한이 이틀인데 마지막 날이니 반드시 가야 했다. 책만 얼른 받아가지고 일주 동로 건너편 세화 읍내로 갔다. 신협에서 현금을 찾았다. 제주 생활하려면 필수인 현! 금! 특히 오일장에서 소소하게 장을 볼 때 꼭 필요하다. 5천 원어치 사고 계좌 이체를 하는 건 좀 우습잖아. 그 외 작은 가게에서 물건을 살 때도 현금이 있으면 좋다. 다음은 하나로마트 차례. 소금과 식초, 쌈 채소를 샀다. 맨날 뭔가를 사도 맨날 필요한 게 생기는 요상한 법칙.


출출한 것이 점심시간이 되었다. 비빔 고기 국수가 먹고 싶었다. 월정리의 '미녀국수n치킨'이란 식당이 맛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오미크론이 유행이라 가능하면 외식을 안 하려고 했으나. 손님이 있으면 포장해 오고 아니면 거기서 먹고 와야겠다. 위치가 월정리 해변 앞 골목이었다. 마침 홀에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비빔국수의 양념이 딱 내 취향이야! 게다가 국수에 얹은 돼지고기가 야들야들 일품이다.


배가 부르면 걸어야 한다. 나의 철칙. 부지런해서가 아니라 걷지 않으면 소화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동백동산으로 가기 전 집에 먼저 들렀다. 차 안에 햇빛이 들이쳐 쌈 채소가 걱정되었다. 혹시 무를까 봐. 냉장고에 채소를 담은 비닐봉지를 던져 넣고 다시 출발. 햇살이 어쩜 이렇게 따스할까? 나는 지난번 언니가 왔을 때 사준 모자를 썼다. 어느새 귀한 햇빛을 가려야 할 때가 되었다니. 많이 과장해서 '상전벽해'의 느낌이랄까.



사실 이날 동백동산을 걸으려고 좀 준비를 해두었다. 동백동산의 나무 이름을 적어놓은 '지도 손수건'이 있다. 저번에는 그걸 보고 나무를 찾아가며 걸었다. 그런데 글씨가 너무 작아서 걷는 내내 두통이 생겼다. 돋보기를 쓰고 걸어도 불편하긴 매한가지일 것이다. 이번엔 머리를 좀 굴렸지. 흐흐흐. 쪽지에 앞뒤로 나무 번호와 이름을 적었다. 안경이 필요 없게 아주 큰 글씨로. 아이구, 어찌나 보기가 편한지! 내 손이 내 딸일세!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걷는데 평소보다 시간이 훨씬 많이 걸렸다. 벌써 5시? 돌아 나오는 길, 발걸음이 무겁다. 무리했나 보다.


여기서 그쳤으면 좋았겠지만, 발동이 걸린 김에 치킨을 사러 다시 월정리로 달렸다. 아까 먹은 식당에서 국수도 팔고 치킨도 판다. 비빔국수가 맛있었으니까 치킨도 믿어보기로 했다. 안타깝게도 우리 집은 음식 배달이 안 되는 시골이다. 돈을 줘도 배달을 시킬 수 없다는 슬픈 이야기. 전화로 주문을 해놓고 직접 찾으러 가는 수밖에 없다. 제주에 와서 석 달 동안 딱 한 번 치킨을 먹었다(세화 읍내에 있는 교촌치킨이었는데 생각보다 맛이 없었다).


프라이드치킨 한 마리를 위해 나는 또 차를 몰았다. 근데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잘못 들어갔다가 시간이 지체되고 말았다. 치킨은 그 사이 꾸준히 식고 있을 텐데. 마침내 받아든 치킨 상자에서 나는 냄새가 "참으로 반갑구나, 야!" 치킨에 맥주가 빠질 수 없지. 오늘 저녁은 치맥이다! 편의점에 들러 만 원에 4개짜리 캔맥주를 샀다. 집에 돌아왔더니 치킨은 이미 제 온도를 잃었다. 그럴 만도 하지. 그래도 어쩜 이렇게 꿀맛이니?


온종일 돌아다녔겠다, 술도 한잔했겠다, 피곤하구나. 그런데 참으로 좋구나. 드디어 봄이 오다니. 이렇게 느닷없이. 기대하지 않았는데 들이닥치는 계절, 니가 정말 반갑구나. 초대하지 않은 손님에게 이렇게 기쁠 일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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