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새벽에 깼다. 4시? 방은 썰렁했다. 요즘 나는 차렵이불 두 개를 사용한다. 얼마 전 겨울 이불에서 탈피했다. 과천 집에서 가져온 두꺼운 이불을 겨우내 덮었다. 날이 따스해져 빨아 말리고 옷장 안에 집어넣었다. 행원리는 20도 언저리였다가 16도쯤 떨어지기도 한다. 20도 이하이면 새벽에 은근히 춥다. 그럴 땐 이불 하나를 발치에 두었다가 끌어올려 덮는다. 잠들 때는 하나만 덮고 나중에 하나를 더 덮는 것이다. 가스비가 무서워 밤에도 보일러를 돌리지 않는다.
더 자야 할 텐데. 4시에 일어나 뭘 하겠나. 일단 눈을 감았다. 운 좋게 다시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6시. 9시 반까지 H 병원에 가야 한다. 8시 반에 출발하려면 7시에 일어나야겠다. 대충 우유 한 잔 마신 뒤, 머리를 감고 말려야 하니까. 나는 따뜻한 이불속에서 뒤척였다. 한 달에 한 번, 잠자는 약을 처방받으러 병원에 간다. 유방암 치료 후 불면증 환자로 사는 법이다.
제주 시내까지 왕복하는 시간이 아까워서 이른 아침으로 예약을 잡았다. 진료 보고 약을 사는데 한 시간. 이른 점심을 먹는데 넉넉잡고 또 한 시간. 그 후에 절물휴양림의 '장생의 숲길'을 한두 시간 걸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날씨가 매우 수상하다. 잔뜩 흐린 데다 바람이 꽤 불고 있다. 준비를 마치고 나가보니 아, 춥다. 아니 지금 5월 하고도 10일인데 늦가을처럼 싸늘한 건 반칙이잖아??? 제멋대로 구는 섬 날씨를 내가 어쩌겠냐만, 입이 튀어나온다.
월요일 아침은 병원에 주차할 곳이 없었다. 일견 머리를 써서 화요일로 잡았는데 에고, 마찬가지였다. 주차장을 두어 번 돌다가 그냥 일렬 주차를 하고 기어를 중립에 놓았다. 아침 일찍 진료를 보면 오후 시간을 알차게 쓸 수 있다. 단점은 주차가 곤란하다는 것. 오후에 진료를 보면 주차 자리는 넉넉하다. 그러나 어정쩡한 시간대이기에 제주시 왕복만으로 하루를 날린다. 예약을 잡을 때마다 고민이 된다.
서울 S 병원을 다니다 제주에 와서 H 병원으로 옮겼다. J 병원을 더 쳐주는 것 같지만, 환자들이 너무 많다고들 했다. 주차도 훨씬 복잡할 것이고. 병원 의사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기에 조금이라도 가까운 H 병원을 찾아갔다. 처음 진료를 보던 날이 생각난다. 그때 나는 충격과 혼란에 빠졌다. 의사 선생님이 영 다른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신경안정제로 이루어진 내 (불면증) 약을 오래 먹다가는 나중에 치매가 올 수도 있단다. (뭣이라고라?!) 그리고 두 달 세 달씩 약을 처방하는 건 평생 약을 먹으라는 소리와 같단다. 본인은 3~4주 처방만 주겠다고 했다. 서울 S 병원 의사(교수님)는 약을 부담스러워하는 나에게 늘 '내성이 없고 안전한' 약이라고 안심을 시켰다. 두 달 처방은 기본이었고. 같은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인데 정반대의 소견이라. 도대체 누구 말을 들어야 해???
불면증이 있어도 약을 먹지 않거나 약을 먹어도 점차 줄여 끊어야만 한다는 게 이분의 지론이었다. 본인도 불면증인데 약이 먹기 싫어서 전혀 먹지 않는다고도 했다. 서너 시간을 자면서 할 일을 다 한다는 것이다. 오마나, 그게 가능해?! 그래서 서울 약보다 조금 줄여서 처방을 해주었다. 사실 서울 의사는 오래 만났지만 불면증 해결을 위해 조언을 하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나는 제주 의사의 말에 처음엔 충격을 먹었다가 나중엔 이해를 했다. 옳은 말인 것 같았다. 줄여서 끊을 수만 있다면 그게 최고지. 그래 한 번 해보자. 그러나. 이 약을 먹고는 점점 깨는 시간이 빨라졌다. 충분히 자지 못하고 새벽에 깬다. 나는 일주일에 두어 번씩 길게 걷고 운전도 (내 기준으론) 많이 했다. 몸이 버텨낼 재간이 있나? 걷기와 운전으로 인한 피로, 수면 부족. 삼중고였다.
오늘은 어떡하든 잠을 잘 잘 수 있게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피곤해서 도무지 글을 못 쓰겠으니 어쩌겠냐고. 제주에 왜 왔냐고. 일 년 살이라는 큰일을 벌여놓았다. 벌써 만 5개월이 되었다. 제주살이를 글로 남기지 못하는 상황이라니, 말도 안 되는 거였다.
나는 의사 앞에 앉아 상황을 설명했다.
'점점 수면이 짧아져서 일상이 너무나 힘들다. 도통 피로가 풀리지 않는다. 벌써 두 달이 되었다. 피곤한 것도 문제지만 일을 못 하는 게 더 문제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잠을 잘 잘 수 있을까?'
의사는 나보다 더 길고도 긴 설명을 했다.
'환자는 자신을 개별화시키려고 하고 의사는 환자를 일반화시키려고 한다. 즉 환자는 자기 몸의 상태가 다른 환자와 다르다고 주장하며 개별적인 처방을 요구한다. 그러나 의사는 어떤 환자라도 일반화된 시각으로 바라보며 정해진 기준 안에서 처방을 내린다. 환자들의 80%가 일반적인 경우다. 내 몸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생각을 버려야 치료가 먹힌다. 그걸 받아들이는 동안의 고통은 감수한다. 다시 말해, 잠을 못 자서 일을 못해도 그것을 견디고 루틴을 만들어야 한다. 의사인 나도 그렇게 산다.'
맞는 말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의사가 말하는 일반적인 환자 80%에 내가 든다면 맞는 말이다. 만약 나머지 특이한 20%에 든다면 틀린 말이 된다. 과연 의사는 그걸 판단할 수 있을까? 판단의 근거는 있는 걸까? 제각기 다른 상태의 개개인을 80%라는 범주에 뭉뚱그려 집어넣는다는 자체가 혹시 잘못된 건 아닐까?
불면증을 가진 사람들이 견디며 산다고 해서 나도 그럴 수 있는 상태인지 저 의사가 알까? 나는 생활이 안 될 정도로 타격이 큰데? 의사인 나도 세 시간을 자고 일을 다 하는데 당신이라고 왜 못 하냐고? 글쎄요.
환자가 적어서일까 원래 이 선생님 스타일일까. 아무튼 환자보다 말을 많이 하는 의사는 처음 봤다. 조금 웃겼다. 의사는 잠을 길게 잘수록 약에 의한 나른함이 낮의 피곤함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쭉 잔 날에 그 나른함과 피곤함을 더욱 느껴야 했다. 나는 반대였다. 무리 없이 길게 잔 날은 당연히 피로를 느끼지 않았다. 멀쩡하고 활동적으로 하루를 보냈다. 못 잔 날에 피로하다니까요. 결국 의사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내 말에 동의하고 약을 아주 약간 늘려주었다. 사실 약을 늘리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잘 모르겠다. 의사는 결국 불면증에 몸을 적응시키라는 얘기였다. 그 과정의 불편함과 고통은 감수해야 한다고. 그러자니 일을 못 하겠다니까요. 모든 일을 내려놓은 뒤에라야 그런 시도를 할 수 있을까? 내가 이상한 걸까??
나는 병원 앞 해장국집에서 소고기 해장국을 먹었다. 맑은 국물이 내 취향. 나는 진하게 뼈를 우린 국물은 싫어하는 편이다. 먹었으니 걸어야겠는데. 날이 스산해도 지독하게 스산해. 걸으면 춥겠어. 안 걸으면 소화가 안 될 텐데. 어째 매번 고민거리만 생기지? 에라, 오늘은 걷기를 건너뛰기로.
근처 주유소에 들러 진공 청소를 했다. 바닥의 시트를 들어내어 털고 잔뜩 낀 모래와 마른풀과 먼지를 제거했다. 그동안 몰랐는데 제주 시내 주유소는 오백 원을 넣고 진공 청소만 할 수 있더라고. 이런 게 제주의 도시 생활이로군. 구좌읍의 주유소는 자동세차 시설 자체가 없었다. 제주도는 원래 그런 줄 알았지.
뭔가 이대로 집에 돌아가기가 아쉽다. 커피나 한 잔 마시고 가자. 네이버 지도에 근처 카페를 검색했다. 핸드드립 카페가 하나 나오네. 바로 앞이었다.
에티오피아 시다모가 있었다. 내가 매일 마시는 원두. 그걸 시켰다. 맛은 내가 내린 거나 다를 바 없었다. 분명 바리스타 게 더 맛있어야 하거늘??? 커피 잔이 예뻐서 탐이 났다. 커피보다 잔이 더 맘에 들어. 그나저나 식후 커피는 역시 에스프레소야. 50분을 달려 집에 왔다. 오전 일정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