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는 지고 노을만 남았다, 풀벌레가 노래한다

너희들의 호시절

by 소율

<2022. 8. 25>


에어컨 리모컨이 작동하지 않는다.

건전지를 갈아야 할 시점인가 보이.

2.7km 떨어진 (가장 가까운) 편의점에 갈 것이냐,

8.6 km 떨어진 하나로마트에 가서 제대로 장을 볼 것이냐.


해가 지고 나면 밖에 나가지 않는 게 나의 습성이다.

새벽형 인간도 아니지만 올빼미형 인간도 아닌, 어정쩡한 낮시간형 인간이라 해야 할까.


저녁 6시 30분.

해는 기울고 있었다.

귀찮다, 그냥 편의점에 다녀오자.


차를 몰고 근처까지 왔을 때 돌연 변덕이 생겼다.

뭣 땜시? 바람 땜시!

창문 4개를 열고 달려왔다.

바람이 춤추듯 불어온다.

내 머리카락도 마구 장단을 맞춘다.


아우, 시원해!

속이 트이는 것 같다.

에어컨을 안 틀고 운전하는 게 얼마만이야?

기왕 나온 거 읍내까지 달려!

이 바람을 타고 가자!


장바구니 안에 든 것들.

두부, 계란, 돼지고기, 용과, 복숭아, 호박, 브로콜리, 양파, 간편죽, 김밥, 건전지.

뭐가 이리 많아.

하긴 장 본 지도 한참 되었으니.


하나로마트 주차장에서 매미 소리, 풀벌레 소리가 요란했다.

찌르르, 따르르, 후르르......

읍내 도로변인데 가을벌레들은 상관이 없나 보다.

우리 세상이다, 우리 시간이다,

마음껏 소리치고 노래한다.



돌아가는 길.

해는 지고 노을만 남았다.

빨간불에 두 번이나 걸려 주어 얼른 사진을 찍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노을이 아니라네.

동일주도로를 서쪽 방향으로 달려야 노을 뒤꽁무니라도 잡을 수 있다.

동쪽 동네는 이쁜 노을을 감상하기 힘들답니다.


저녁 나들이도 괜찮네.

가끔 나가야겠어.

집에 오자 완전히 캄캄해졌다.


거실에서 여전히 똑같은 벌레 소리가 들린다.

소란하다.

너희들의 호시절이로구나.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까 말까 망설이는 계절의 마음이 느껴진다.


나에게도 좋은 시절이길.

당신에게도 아름다운 시절이길.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휴양지 제주도에서 평범한 도시로 피서를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