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개구리 바람이 아까워서, 아침 산책

겨울에 몰아치던 얄미운 바람이 막상 여름엔 잠잠했다

by 소율


<2022. 8. 26>


아침에 일어나 날씨를 확인하곤 조바심이 일었다.

7시 반, 25도.

구름이 잔뜩 끼어 햇빛도 없다.

바람이 살랑 분다.

지금 나가 걷고 싶다, 운전하지 않고서.


겨울과 초봄에 걸었던 우리 동네 뒷길이 떠올랐다.

시골의 후미진 길에 인도란 존재하지 않는다.

걸을 수 있게 만들어진 길을 찾아가지 않는 이상, 시골일수록 집 주변에서 걷기가 더 힘들다.

읍내 정도는 되어야 인도와 차도가 구분된다.

뒷길은 그냥 시골 차도다.



아래는 1월에 걸었던 이야기.

https://brunch.co.kr/@soyuly/373



숲길과 오름은 가능하면 9월 중순 이후에 걸으려고 한다.

요즘도 많이 시원해졌지만 아직 풀들의 전성시대가 끝나지 않았다.

여름의 기세가 확실히 꺾이는 최적의 시기를 기다려야지.


오랜만에 뒷길에 나섰다.

세수하고 선크림 바르고 모자 쓰고.

양말 신고 운동화 신고 물 한 병 들고 핸드폰 가방 메고.

산책하는 데도 준비가 필요하다.

출발 시간 7시 50분.


우리 빌라(오래된 타운하우스)에서 차도로 나가는 길목의 모습은 이렇다.

시멘트로 대충 발라놓은 도로와 양옆에 잡목, 덩굴, 풀들이 얽혀 있다.


한두 시간에 한 번씩 다니는 버스 정류장과 빌라 입간판을 지나 차도로 들어간다.

나는 그 버스를 한 번도 타보지 않았다.

제주살이를 하기 전에 제주 여행을 왔을 땐 늘 버스만 타고 다녔다.

사람 달라지는 거 한순간이다.

여행과 생활은 완전히 다른 것임을 새삼 깨닫는다.



차도 옆의 풀밭은 주기적으로 벌초를 해준다.

아마 그래서 허리까지 자라진 않은 모양이다.

조금 걸으면 한 번 휘어지고 또 가다 보면 휘어지고를 반복하는 구불구불한 길.

이른 아침이라 오가는 차들이 없을 것 같지만.

차 몇 대가 지나간다.

차들은 알아서 나를 피해 중앙으로 달린다.

나도 몸을 가장자리 풀밭으로 기울여 준다.



이 길에 같은 이름의 타운하우스, '제주 *** 빌리지'가 1차, 2차, 3차까지 있다.

우리 집은 3차.

나의 목적지는 2차를 거쳐 1차까지 가는 것이다.

약 30분이 걸린다.

왕복하면 1시간이니까 아침 산책으론 그만이라오.



부지런히 걷기만 하면 빠를 것을, 나는 꼭 사진을 찍는다.

별것 없는 시골길인데 매번 눈길을 끄는 것들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붉은 동백나무 열매를 보았다!

생긴 게 동백꽃 송이를 닮았다, 신기하다.



흰색 몸통에 가운데 자주색 별 모양 점(?)이 있는 이 꽃은 뭘까?

다른 나무를 타고 올라간 덩굴식물이다.

네이버 렌즈가 대답해 준다.

'계요등'이란다.

처음 본다.

꽃송이가 올망졸망 작은 것이 귀엽다.


집에 돌아오니 8시 55분, 7천 보.

오랜만의 아침 산책이 즐겁다, 가벼워서 좋다.

바람 불고 시원하기만 하다면 언제라도 오케이지.


겨울엔 그리도 싫어했던 바람이거늘 여름엔 목을 맨다.

겨울에 몰아치던 얄미운 바람이 막상 여름엔 잠잠했다.

청개구리 심보를 닮았다.


맨날 바람 얘기만 하는 것 같다.

제주에선 언제나 바람이 관건이다.

음 바람님아, 제때 제대로 불어 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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