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 와서 오히려 걷기에 소홀해졌다. 앞에서 썼듯 일 년 살이로 얻은 집에 자리 잡느라 우여곡절이 많았다. 삶의 터전을 옮기는 일이 쉬울 리가 없지. '일상'이라는 놈은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실은 매우 '별거'란 말씀. 톱니바퀴 돌아가듯 작은 부분들이 착착 맞아떨어져야 비로소 '일상이 완성된다.'
나에게 '걷기'란 행위는 상당히 중요하다. 평생 꾸준히 해온 운동이자 몸에 밴 생활이니까. 특히 매일 1시간 정도 걷지 않으면 반드시 위장이 파업을 하고야 만다. 일종의 특이체질이랄까. 간단히 말해 소화가 안 된다, 전혀. 소화불량이 가져오는 최악의 사태는 책상 앞에 앉는 게 불가능해진다는 것. 책상의 노트북을 켜야 하는데, 밀린 글이 많아도 시간이 남아돌아도 손 놓고 있어야 하네요.
올해는 꼭 끝을 보겠다 결심한 두 개의 원고와 연구소 프로그램들과 카페와 블로그, 브런치 포스팅 등. 일을 못 하게 되는 건 물론이고 동시에 하루의 컨디션을 망치는 불상사가 벌어진다.
그래서 날마다 최소 한 시간의 걷기는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막상 내가 사는 이 시골집은 걸을 수 있는 장소까지 차로 이동해야 했다. 15분 거리에 동백동산이 있는데 걷기엔 그만인 곳이다. (비자림도 가깝다) 제주도 기준으로 그리 먼 거리도 아니고.
과천 집에서 대공원 가듯 매일 동백동산을 걷겠다고 결심했지만 맘대로 되진 않았다. 집만 나서면 바로 걸을 수 있었던 이전에 비해 많이 불편했다. 눈이 오는 날마다 (예상외로 눈도 자주 온다?) 어디 어디 도로는 체인을 갖추라는 안전 안내 문자가 날아오면, 뭔가 마음먹고 나가야 하는 부담이 생긴다. 그게 아니라도 걷기 위해 매번 차를 타는 자체가 영 껄끄러웠다.
차 없이, 두 발로, 그냥, 곧바로, 걸을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 집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실 이곳은 오래된 타운하우스인데 주위에 별다른 시설이 없다. 임야 한가운데 펜션과 타운하우스가 뚝 떨어져 있는 지역이다.
이번 주는 그 반대 방향, 뒷길을 탐색했다. 제주도 시골의 흔한 차도의 모습. 차도 옆에 인도는 없다. 그래도 풀이 무성한 여유 공간이 있어 차가 달려오면 옆으로 피할 수 있다. 외진 길이라 다행히 차는 가끔 한 대씩 지나간다. 구름이 많았지만 그럭저럭 파란 하늘이 보였다.
저건 아마 둔지 오름 일 것이다. 그다지 유명하진 않으나 집에서 가장 가까운 오름이다. 바람이 심하게 불던 날 가보았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따로 하기로 하자. 차도 옆은 나무들과 억새 그리고 여러 가지 풀들이 자라고 있었다.
오른편에 이층 집이 보인다. 널찍한 대지에 근사한 집을 지어놓았다. 아직도 공사 중인 것 같았다. 집으로 들어가는 현무암 돌담길이 단정하다. 점점 구름이 몰려왔다. 아침엔 잠깐 맑아도 이후엔 내내 흐려지는 게 일반적인 겨울 날씨일세.
다음날은 밤에 영하 1도까지 떨어졌다. 아침 일찍 나갔더니 풀잎에 서리가 앉았다. 제주에선 나름 추운 날씨였나 보다. 보송보송한 잔털이 따뜻해 보이지만 쟤네들은 얼어있을 테지. 하얀 솜털에 싸인 클로버가 귀여웠다.
여기가 내가 정한 종착지, 711-2번 버스 정거장. 집에서부터 2.3km 지점이다. 왕복하면 4.6km. 원했던 '가볍게 한 시간 걷기'에 딱 맞는다.
아직 유리창에 성에가 남아있었다. 추운 날 인정!
다음으로 비 오는 날 편. 비가 와도 바람이 없고 기온이 높았다. 주룩주룩 쏟아지는 비가 아니고 옅게 흩뿌리는 비라서 걷는 데 지장은 없었다. 마치 봄날 느낌. 계속 이렇게 따뜻했으면 좋겠다.
반환점까지 금세 도착했다. 여러 번 걸었더니 익숙해졌나 보이. 벤치에 앉아 유리창에 맺힌 빗방울을 들여다보았다. 이런 게 비 오는 날 갬성인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 비가 그쳤다. 거의 다 와서 방풍림이 나타났다. 양쪽으로 키 큰 나무들이 늘어선 경치도 멋있지만 진짜 이 구역엔 바람이 안 들어온다. 뻥 뚫린 차도에 비하면 훨씬 포근하고 든든하다. 길이 길지 않은 게 아쉽다. 섬의 거센 바람을 막는 건 용감한 나무들이라오.
지나갈 때마다 궁금한 폴로 컨트리클럽. 처음엔 승마장인 줄 알고 좋아했구만. 사실 가능하다면 승마를 한 번 배워보고 싶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폴로를 한다고? 영국 귀족들이 한다는 그 폴로?
길을 따라 쭉 들어갔더니 잘 닦인 도로와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고 쓰인 입구가 보였다. 나는 관계자가 아니기에 착하게 얼른 발길을 돌렸다. 뭔가 부티 나는 냄새가 솔솔 풍기긴 하더라. 다음엔 미친 척하고 더 들어가 볼까? 아서라 쫓겨날라.
집 앞의 양방향 차도를 탐색한 결과, 매일의 걷기 루틴을 정했다. 바로 뒷길. 앞길보다 바람이 적고 거리도 적당했다. 일어나자마자 간단히 아침을 먹고 뒷길로 나선다. 차도를 걷는 건 위험할 수 있지만 양옆의 풀밭이 인도 비슷한 역할을 해주므로 괜찮았다. 차가 달려오면 풀밭으로 피신했다가 완전히 지나간 뒤 다시 걷는다. 풍경도 그만하면 나쁘지 않고요. 이가 없으면 잇몸인 거지.
제주도까지 와서 겨우 차도를 걷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차를 타지 않고 바로 걷고 싶으니까 어쩔 수 없다. 여유가 있는 날은 동백동산이나 비자림에 가면 되고요, 근처에 오름도 많고요. 아무 때나 걸을 수 있는 길을 정해놓으니 훨씬 안심이 된다. 집 문을 열고 나가 곧장 걸을 수 있는 건 엄청난 특권이라는 걸 아시는지요? 당신이 그런 곳에 사신다면 맘껏 누리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