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면 날씨부터 확인한다. 제주에선 온도가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바람이거든. 한 달 동안 겪어본 바로 보통 초속 7~8미터 정도이고 심하게 부는 날은 11~13미터. 일단 12월 중순에서 현재 1월 중순까지는 그렇다. 오늘은 거실 창밖의 후박나무 잎사귀들이 그림인 듯 움직이지 않는다. 바람에 관한 한 로또 맞은 날이다. 일기예보엔 2~3미터, 가뭄에 콩 났다.
바람이 많은 날은 숲으로 가는 게 낫다. 가까운 동백동산이나 비자림에서는 높게 뻗는 가지들만 바람에 흔들릴 뿐, 숲길 안은 고요하다. 햇빛 아래 아이스크림처럼 숲은 드센 바람을 품어 녹여낸다.
오늘같이 바람이 잠자는 날, 맘먹고 동네 산책을 나섰다. 내 집은 큰길 행원 교차로에서 2.7km를 더 들어가는 곳. 맨날 차로만 다녔지 걸어가 보질 못했다. 이 길을 걷기는 한 달 만에 처음이다. 집을 건사하느라 바쁘기도 바빴다. 집을 나서면 시골 도로가 나타난다. 약간 구불구불하게 큰길까지 이어져 있다.
도로 양옆은 잡목과 풀이 자라 있다. 구름이 가득한 하늘. 곧 당근밭이 나타났다. 잎들이 누런 것이 수확할 시기인가 보다. 역시 캐어놓은 당근들이 줄줄이 쌓여있다. 아침 일찍 나오니까 이런 광경도 보네. 땅에 붙어 일하는 사람들. 이 넓은 밭을 언제 다 캐나?
가까이 가보았다. 줄기가 붙어있는 놈들도 있고 깔끔하게 밑동이 잘린 놈들도 있다. '구좌당근'이라고 쓰인 상자들이 쌓여있다. 와 이렇게 바로 캐어 상자로 직행하는구나. 내가 지난 장날에 사 온 줄기 달린 당근도 저런 것일까? 아실지 모르겠지만 구좌읍은 당근이 유명하답니다.
당근밭을 지나 '한라용사촌' 마을이다. 이름으로 유추하건대 국가유공자들이 모여사는 곳 같았다. 몇 발 안으로 들어갔다. 동네 안에 반듯한 도로가 있고 양쪽으로 똑같은 집들이 나란히 있었다. 언뜻 보기엔 타운하우스와 비슷했다. 갑자기 사납게 개 짖는 소리가 들려서 얼른 도망 나왔다. 외국이나 우리나라나 시골길의 무법자는 커다란 개들이다. 묶여 있는지 따라 나오지는 않았다. 다행이다. 다음부턴 방어용 막대기라도 들고 다녀야 하나? 나는 큰 개가 무서워요.
도로의 맞은편에 또 밭이 펼쳐졌다. 쪽파 같기는 한데 줄기가 짧고 누렇게 시든 게 많았다. 저 상태로 내어 팔진 않을 것 같은데. 혹시 종자용 쪽파인가? 답을 아는 사람 계시면 알려 주세요.
다음 밭에는 당근과 다른 작물이 같이 자라고 있었다. 갓인가, 케일인가? 음, 갓 쪽에 오백 원 걸겠다.
길 끝에 바다가 보였다. 길 따라 바다까지 간다면 행원포구가 나올 것이다. 물론 걸어갈 만한 거리는 아니다. 행원 교차로까지만 가도 2.7km이고 집까지 왕복하면 5.4km.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오늘은 이쯤에서 돌아가기로 했다. 스마트밴드엔 4 천보가 찍혔다.
몸을 돌리니 없던 바람이 느껴졌다. 다시 반대로 몸을 돌리자 바람이 사라졌다. 신기했다. 바람이 집 쪽에서 불어오는구나. 2~3미터의 바람이 요놈이었군.
왔던 길을 다시 걷는데 오마낫! 돌연 한라산이 솟아났다. 머리에 하얀 눈을 이고 구름 아래 펼쳐진 한라산의 위용이란! 한 달 내내 이 길을 운전하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여기가 한라산이 보이는 위치였어? 눈으로는 저렇게 선명하건만 사진으로는 조그맣기만 했다. 확대해서 찍었더니 볼 만해졌다. 하긴 제주도 어디에서라도 가장 높은 한라산이 보이겠지. 도로가 구부러지자 한라산은 사라졌다. 같은 길인데도 '한라산 조망구역'이 따로 있구먼. 길을 돌면 다시 보였다가 이윽고 구름에 가려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세상엔 걸어야만 보이는 것이 있다. 차로 휙 스쳐가면 절대 볼 수 없는 것들이. 평생 걷는 이로 살았다. 운전을 한 지는 3년밖에 되지 않았다. 평소보다 오래 걷기 위해 제주로 여행을 오곤 했다. 이제 일 년간 살기 위해 온 이곳에서 나는 늘 차를 몰고 다닌다. 시골 생활의 아이러니랄밖에. 걷고 싶은 장소까지 차로 이동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라붙었다. 걷기 위해 차를 탄다.
신령스러운 곶자왈도, 천년의 숨결이 배어있다는 비자림도, 유명한 올레길도 아니지만 온전히 두 다리만 사용할 수 있는 집 앞 도로가 소중해졌다. 한적한 시골길이어서 오고 가는 차량이 적다. 차도 옆으로 여유 공간이 있어 걷기에 위험하지도 않다. 운전하기 싫을 때, 가볍게 걷고 싶을 때, 오늘처럼 바람이 잠잠할 때라면 자주 걸어야겠다. 특히 바람, 니가 도와줘야 된다. 알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