밋밋하게 별일 없이 너무 잘 지내서 탈?

그들이 떠난 후, 나는

by 소율

제주도에서 첫 번째 설 연휴를 보냈다. 설날 전에 남편과 아들이 3박 4일, 설날 후에 언니가 2박 3일. 번갈아 제주 집에 왔다. 특별하다면 특별한 명절이겠지. 아들은 하필 배탈이 심하게 나서 거의 누워있다가 (에고 안타까워라!) 삼다수숲길만 셋이 같이 걸었다. 언니에게는 3일이 꽉 차게 맞춤 투어를 선사했다. 요양병원에 계시는 엄마를 언니가 거의 전담하다시피 돌보고 있었다. 평소의 고마움과 미안함을 이번 기회에 조금 갚은 것 같다.



남편과 아들을 보내 놓고 허전하면 어떡하나 내심 걱정이 되었다. 웬걸?! 생각보다 멀쩡하다. 하긴 과천 집에서도 남편은 늘 늦게 들어오고 주말은 주말대로 나갔다. 아들 역시 학업과 군대로 오랫동안 떨어져 지냈으나. 집에 오니 직장 다니느라 연애하느라 바빴다. 결론은 이래저래 나 혼자 지내는 시간에 이미 익숙했던 것이다.


여기에서라고 다를까. 늦게라도 가끔이라도 집에 가족이 있는 것보다야 더욱 혼자이긴 하지만. 솔직히 쓸쓸하거나 아쉬울 정도는 아니다. 제주도에 와있으니 남편과 아들이 (이전과 달리) 전화와 톡을 자주 한다. "안 심심해? 혼자서 뭐해?" 이건 남편 대사. "엄마, 별일 없어? 잘 지내?" 이건 아들 대사. 안 심심하다, 잘 지낸다 하면 아들은 그러려니 넘어간다. 남편은 그게 이상한 지 자꾸 물어본다. 설마 당신, 내가 심심하길 바라는 거냐?


벌써 제주도민이 된 지 두 달 가까이 되었다. 곰팡이 창궐 사건 해결하기, 고장 난 보일러 수리하기, 텅 빈 집에 필요한 살림 채우기로 한 달이 훌쩍 지나갔다. 이후 집 주변을 살살 둘러보고 걸어보고 탐색을 하고 있다. 12월 15일에 들어와서 오늘이 2월 7일. 오롯이 겨울의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중. 제주의 겨울은 예상대로 역시 혹독한 편이다. 옛날에 왜 제주도가 유배지였겠냐고.


이곳 구좌읍 동쪽 마을은 매일 바람이 많이 불고 올해는 (의외로) 눈도 자주 온다. 그나마 금방 녹아 다행이다. 다들 제주도가 따뜻한 줄 알지만 사실 과천에서보다 춥다는 사실을 알라나 모르겠네. 기온은 영상이어도 미친 듯한 바람을 맞으면 급 하락하는 체감온도와 함께 영혼까지 탈탈 털리는 기분이다. 뼛속과 마음을 동시에 파고드는 겨울바람이랄까. 동시에 돌아다니고 싶은 의지마저 땅굴을 판다.


집안 온도는 과천 집 실내 온도보다 훨씬 낮아서 실제로 더 추운 게 맞다. 지난달 방 하나만 그것도 밤에만 아껴서 난방을 했는데 가스비가 25만 원이 나왔다. 세상에 고작 방 하나에! 소문으로만 듣던 LPG 가스의 위엄을 매섭게 맛보았다. 낮에는 거실에 보일러 대신 오방 난로를 틀었더니 전기 요금이 12만 원 나왔다.


안타 두 개를 연달아 맞아 내 눈도 같이 튀어나올 뻔했다. 어떻게 해야 슬기로운 난방 생활이 되려나? 솔직히 지금은 에라 모르겠다, 심정이다. 겨울 세 달 동안 난방비는 그냥 포기하기?



아직도 제주에서의 일상이 완전히 자리를 잡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생활이 아주 단순한 것만은 분명하다. 나가기 싫을 땐 집 뒷길을 한 시간 걷고 온다. 설거지하고 세탁기 돌리고 노트북 켜서 뭣 좀 하면 금세 늦은 오후. 콧바람을 쐬고 싶으면 차를 몰고 나가 동백동산을 걷는다. 어차피 나가는 김에 세화리에 있는 다이소도 들르고 하나로 마트도 다녀오면 어느새 저녁 시간. 그곳들을 갈 일은 왜 그리 자주 생길까.



세화 오일장이 서는 날엔 신선한 채소와 갓 만든 반찬을 꼭 사 온다. 여행자였다면 구경만 했겠지만 나는 시골 주민으로서 장 보기가 필수랍니다. 장날에 파는 반찬이 그렇게 맛날 수가 없다. 일단 재료가 진짜 싱싱하거든! 언니에게 당일 산 양념게장을 조금 들려 보냈는데 완전 맛있다고 택배로 왕창 보내달란다.



채소도 어찌나 파릇파릇 살아있는지. 특히 구좌읍 특산품인 당근이 저렴한 건 당근이고 다디달다. 예전엔 당근을 그리 즐기지 않았는데 여기선 볶아먹고 쪄 먹고 모든 요리에 전천후로 애용한다.


장날에 먹을 것만 살까나. 나는 옷도 잘 산다. 처음에 가져온 롱 코트, 오리털 롱 패딩, 드라이클리닝을 해야 하는 니트 등은 진작에 과천 집으로 보내버렸다. 읍내에 나가야 세탁소가 있으니까. 언제 맡기고 언제 찾아와. 불가능. 이동할 땐 항상 나의 모닝을 타는 관계로 긴 외투 또한 불편하다. 이쁘고 멋진 옷도 소용없다. 바람찬 구좌 읍내에 입고 갈 곳도 보여줄 사람도 없음.


그딴 거 말고 내겐 시골 전용 옷이 따로 필요했다. 세탁기로 막 돌려 탁탁 털어 입는 것들 말이다. 도톰한 일반 패딩과 고무줄 기모 청바지, 두꺼운 몸뻬를 구입해서 날마다 뽕을 뽑고도 남게 입는다. 정말 나 자신을 칭찬하고 싶을 정도로 잘 샀다니까.


신나게 장을 보고 점심 사 먹고 커피도 한 잔 마시면서 바다 멍을 때리면 또 저녁때.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하루가 슬렁슬렁 잘도 넘어간다. 딱히 한 것도 없구만. 이것은 제주도 특유의 기이한 현상인가. 그래서 결론은, 밋밋하게 별일 없이 너무 잘 지내고 있다는 것. 3월이 되어 마구 밖으로 뛰쳐나가기 전에 붙들고 있는 원고들을 마쳐야 할 텐데. 봄이 오면 정신없이 곶자왈과 숲길과 오름에 빠질 것 같다.


어렵게 제주에 와서 내가 꼭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다시 마음속을 들여다본다. 그저 한량다운 휴식인가. 1년이 후회 없도록 제주도 전역을 훑기인가. 곶자왈에 실컷 빠지고 누리기인가. 새 원고를 알차게 일구어내기인가. 그 전부인가. 그 일부인가. 아직 한가할 때 나와 깊이 대화를 나누어야겠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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