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제주로 향할 때 나는 가능하면 과천 집에 가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버스나 기차를 타고 쓩 갔다 올 수 없는 섬이지 않은가. 비행시간이 겨우 한 시간에 불과할지라도 제주공항과 김포공항을 왔다 갔다 하는 일이 간단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의외로. 과천이나 서울에 갈 일이 자주 생겼다. 제주도가 생활 터전이 아닌 한시적 이주민은 무조건 공항 가까운 동네에 살아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나는 무시했지. 비행기 소음 가득한 공항 근처라, 생각만 해도 싫었다.
작년 12월 15일에 이사 온 뒤, 얼마나 김포공항을 드나들었나 따져 보았다. 2월에 4박 5일로 한 번. 3월에 1박 2일로 두 번. 5월에 1박 2일과 당일치기로 두 번. 6개월 동안 총 다섯 번. 매달은 아니었지만 격달 쯤이었고 심지어 두 번씩 간 적도 있었다. 가고 싶어 간 게 아니었다. 가정사, 병원 진료, 일과 관련해서 등. 갈 수밖에 없는 일이 자꾸 생겼다.
지난주 금토. 그중 가장 기쁘게 비행기를 탔다. 2020년 봄, 출간 작업을 마친 베트남 여행기가 중단되었다. 이유는 아시다시피 코로나 팬데믹. 여행을 갈 수 없는데 여행기가 팔릴 리가 없으니. 출판사는 인쇄만 남은 출간을 무기한 연기했다. 그 후 2년이 넘었다. 드디어 출간을 재개하자는 연락이 온 것이다! 미팅하자는 전화에 당장 오케이하고 달려 아니 날아갔다. 감개무량. 새옹지마. 식상하지만 그런 단어가 튀어나오네.
나는 제주공항에서 감귤 타르트 한 박스를 샀다. 일종의 선물이자 뇌물? 제 책 좀 잘 마무리해 주세요. 명색이 제주도민이므로 이런 거 하나쯤은 들고 가야지. 대표님과 편집자님을 만나 수정 사항에 대해 의논했다. 제주에서의 근황도 전하고 출간 외에 같이 해볼 수 있는 강의 아이디어를 나누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일 이야기를 하니 힘이 불끈 솟았다.
가볍게 출판사를 나와 전철을 탔다. 그런데 4호선이 언제부터 이랬지? 와우, 완전 좋아졌어! 벽면 위에 화면이 반짝반짝, 현재 몇 번째 칸인지 사람이 많은지 표시가 된다. 게다가 출입문에 조명까지 들어온다. 오오 세련된 걸? 갑자기 몇 달 만에 촌놈이 된 기분이었다.
저녁엔 세 식구가 외식을 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돼지갈비를 먹었다. 남편이 구워주는 고기가 꿀맛이로군! 남편이 유일하게 하는 집안일(에 포함되나?)은 숯불에 고기 굽기. 솜씨가 일품이다. 이것만큼은 칭찬하고 싶다. 내가 그에게 붙여준 별명이 '굽돌이'일만큼.
제주만큼이나 과천도 가로수가 울창해졌다. 행원리나 제주시는 그동안 날씨가 서늘했다. 20도 이상 올라가는 날이 드물었으니까. 오히려 수도권 쪽이 25도 이상으로 나오더라고. 제주가 더 춥다고 하면 다들 믿지를 않는다. 안 믿어도 사실, 팩트랍니다. 이십여 년 눈에 익은 거리를 보자니 어쩐지 약간은 감동스러웠다. 그리고 반가웠다.
집으로 돌아와 와인 한 병을 나눠 마셨다. 집은 아침에 막 로봇청소기를 돌린 티가 났다. 집안일은 주로 아들이 한다. 남편은 원래 가사가 자기 몫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아들이 불평해도 바뀌지 않는 모양이다. 얘라고 얼마나 청소를 하겠어? 내가 온다고 하면 그날 급하게 로봇을 돌리는 것 같았다. 엄마의 잔소리를 듣기 싫어서. 그런데 화장실이, 매우 더럽다. 아들도 거기까진 신경 쓰지 않는다. 내가 매일 관리해 하얗던 변기가 언제 닦았는지 추측 불가였다. 나는 물휴지로 대충 겉만 닦았다. 그 이상은 못 본 척하리라. 1박 2일 일정이라 청소까지 신경 쓸 경황은 없었다. 집에 올 때마다 내가 집안일을 해줘 버릇하면 나는 이중으로 살림을 책임져야 한다. 그러려고 제주에 간 건 아니니까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부자가 알아서 하세요.
다음날 저녁 비행기를 타야 한다. 그럼 그때까지 여유롭냐고? 그건 또 아니지. 1시 30분에 미용실을 예약해 놓았다. 집에 오면 시간을 꽉 채워 모든 일을 해결해야 한다. 내가 처리해야 할 중대사는. 제주에서 열악하고도 힘든 일상, 바로 쇼핑. 구좌읍 하고도 행원리에 사는 내게 쇼핑이란 도저히 만족감을 주지 못하는 행위였다. 제주 시내로 나간다고 다르지 않았다. 물건이 다양하지 않았고 맘에 드는 걸 찾기 힘들었고 가격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비쌌다. 나는 제주도를 일명 '쇼핑 지옥'이라 부른다. 그래서 과천 집에 갈 때마다 목록을 적어 큰일을 해내는 심정으로 쇼핑에 임한다.
이번 목록은 시원한 인견 마스크, 운전용과 등산용 여름 장갑, 숲길 걸을 때 입을 여름 재킷, 속옷, 수건 등이었다. 과천 이마트에서 일차로 고르고 나머지 없는 물건은 평촌 뉴코아 아웃렛에서 살 생각이었다. 예전 내 사무실이 있던 건물 옆 새서울쇼핑에서 마스크와 장갑을 발견했다. 어쩌면 그렇게 맘에 드는지! 인견은 아니었지만 얇고 시원한 천 마스크였다. 끈까지 조절 가능, 완벽하네. 장갑조차 내 손에 딱 맞았다.
제주에선 만만한 쿠팡 걸 샀었지만 너무 크고 두꺼웠다. 물건이 문제라기보단 내 손이 워낙 작은 탓이다. 안성맞춤인 제품에 돈을 쓰는 건 돈을 버는 것만큼이나 흡족했다. 속옷, 수건과 재킷은 이마트에서 해결. 아싸, 평촌까지 가지 않아도 되었다. 작디작은 도시 과천에서 이토록 쇼핑이 쉽다니!
그 후 시내에서 아들을 만나 이른 점심을 먹었다. 우리의 선택은 단골 파스타 식당. 12월 이후 처음 먹는 스파게티였다. 익숙하고 여전히 맛있다! 제주도라고 식당이 없겠는가. 가까운 김녕 해변에도 파스타집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혼자 그걸 먹으러 가게 되지는 않더라고. 주로 고기 국수 같은 걸 먹는달까. 현지에선 현지식? 아들이 파스타를 쏘고 내가 커피를 쏘았다. 이것 참 지혜로운 모자로세.
드디어 미용실 차례. 미용실은 5개월 만의 방문이자 5개월 만의 파마였다. 여자라면 누구라도 이해할 것이다. 아무 미용실에나 갔다가는 몇 달 동안 머리카락을 붙들고 후회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것을. 그런 경험이 다들 한 번쯤은 있지 않나? 가던 미용실 단골 디자이너. 실패가 없는 방법이다. 나는 최대한 오래 버틸 요량으로 빠글빠글한 파마를 주문했다.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어서 디자이너 그녀는 재차 확인을 했다. 진짜로 해도 되겠냐고. 네 됩니다. 앞머리 옆머리까지 디지털 파마로 곱슬곱슬하게 잘 나왔다. 한동안 머리 걱정은 덜었다.
빡빡한 1박 2일 일정을 마치고 제주공항에 도착했다. 그게 끝이 아니여. 급행버스 101번을 놓치지 않으려고 화장실도 들르지 않고 2번 게이트로 뛰었다. 간신히 버스를 잡았다. 김녕까지 약 한 시간. 이미 깜깜한 밤중이었다. 9시가 넘은 제주시내는 적.막.강.산. 제주시도 이렇구나. 김녕리의 한 구석에 세워둔 마이카 모닝에 올라탔다. 하룻밤을 혼자서 잘 지냈니? 상향 등을 켜고 어두운 시골 길을 달렸다. 빨리 내 집에 가고 싶다. 가서 눕고 싶다. 누워 자고 싶다. 짧고도 굵은 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