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불어 좋은 날
<2012년 8월 29일>
태풍이 지나갔다.
잔 나뭇가지들과 잎사귀들을 잔뜩 떨어뜨려 놓았지만 그다지 피해는 없었다.
마른 태풍이라나.
비가 거의 없어서 한결 나았다.
아직도 구름이 하늘을 덮고 바람이 윙윙 불어댄다.
딱 좋을 만큼의 바람이다.
지긋지긋하게 더웠던 날들을 보상해 줄 듯한 맛보기 초가을이랄까.
그냥 하릴없이 슬슬 걷고 싶었다.
좋은 핑곗거리가 생각났다.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가면 되겠다.
오늘 아니면 연체라도 되어서 도서관 출입을 거부당할 것처럼 얼른 도서관으로 갔다.
도서관 옆 그늘진 나무 밑을 걷노라니 몸과 마음이 바람에 날아가는 것 같다.
아, 시원해~
이런 날은 또 하나 해야 할 의무가 있다.
공원 그늘진 벤치에 앉아 책을 읽어야 한다.
이렇게 바람 부는 날이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니까.
김훈의 '자전거 여행'을 빌렸다.
공원 벤치에 앉아 읽기에 딱 좋은 책이다.
"산수유는 다만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서 피어난다."
"그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가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이건 뭐 문장마다 기가 막히다.
"냉이 된장국을 먹을 때, 된장 국물과 냉이 건더기와 인간은 삼각 치정 관계이다."
이 대목에선 큭큭 웃음이 나왔다.
두어 문장 읽고 하늘을 올려다 보고 또 서너 문장 읽고 펄럭대는 나뭇가지들을 바라보았다.
공원은 아직 태풍의 잔재들을 치우지 못했다.
땅바닥에는 제 몸에서 떨어져 나온 가지들과 잎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그 사이로 굵은 개미들이 정신없이 발발발 돌아다녔다.
몇 놈은 기어코 내 발등 위로 기어올랐다.
머리통이 작은 아이들이 잔디밭에서 뛰어다녔다.
어느 순간 나뭇잎들 더미가 땅바닥에서 일렁일렁 춤을 추었다.
그림자 사이사이에서 하얗게 빛이 났다.
햇빛이 비치니 바닥은 명암이 살아 생기 넘치는 3차원 공간처럼 보였다.
한순간 빛이 사라지면 다시 밋밋한 회색 바닥으로 돌아갔다.
빛과 그림자는 같이 있어야 온전하구나.
예고 없이 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림들이 마술 같았다.
전에도 이런 것이 이렇게 경이로웠던가?
왠지 안심이 되었다.
사람 마음에 빛과 그림자가 함께 있어도 괜찮겠구나.
그래도 괜찮은 거였구나.
이래저래 바람 불어 좋은 날!
* 이 매거진은 유방암을 겪으며 살아온 세월에 대한 에세이입니다.
2011년 11월 유방암 수술을 받았고 이어진 치료과정에서 썼던 유방암 경험기지요.
실제 이 글을 썼던 시기는 2012년입니다.
간혹 현재 진행 중인 이야기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알려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