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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율 Dec 20. 2022

이것은 일기입니다, 다람쥐 같은 하루


<2022. 12. 16>


'일기는 일기장에!'

'이걸 글이라고 썼냐? 혼잣말은 일기에나 써라!'


어떤 글에 달린 댓글을 보면 자주 나오는 말. 솔직히 아주 가끔은 동감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름 근거를 가지고 성의껏 썼는데 형편없는 일기라 치부한다. 설사 일기 비슷해도 말이지, 당신은 그런 일기라도 써봤냐? 성내고 싶을 때가 많았다.


각설하고 이 글은 오늘의 일기다. 그렇다, 얍삽하게 미리 방어막을 치는 거다.



아침 10시 40분. 내 차에 올라탔다, 아니 타려고 했다. 11시에 치과 예약이 있었다. 치과뿐이랴, 줄줄이 사탕처럼 산부인과, 내과 모두 일정이 세 개였다. 올해 안에 끝내야 할 검사를 하루에 몽땅 집어넣었다.


그러나 차는 어제 온 눈을 두텁게 뒤집어썼다. 짙은 하늘색 차체 위에 하얀 눈이 가득했다. 멀리서 바라보면 조금 낭만적인 풍경이겠지. 허나 시간을 딱 맞춰 나온 나로선 퍽 난감했다.


여느 빌리가 그렇듯 우리 빌라 주차장은 거주민들의 차를 모두 수용하지 못한다. 빌라 입구의 바깥 자리가 내 구역이다. 여름엔 오븐처럼 햇빛에 달궈지고 겨울엔 동태처럼 꽁꽁 어는 성격이 과히 좋지 못한 자리라 할 수 있다.


근처에 플라스틱 빗자루가 보였다. 매주 빌라 청소를 하는 업체가 사용하는 것이다. 나는 그걸 집어 들고 일단 차에 쌓인 눈을 쓸었다. 반 정도는 쓸리고 나머지는 얼어서 차에 들러붙어 있었다. 당시 기온 영하 5도. 어제부터 이틀째 얼어붙은 눈이었던 것이다. 특히 앞 유리가 문제였다. 그 상태론 시야가 안 보여 운전 불가.


일단 시동을 걸고 유리창에 히터를 강하게 틀었다. 내 차는 더운 바람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한참 걸린다. 분명 히터인데 마치 에어컨인 것 같은 착각을 매번 할 정도다. 예약 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건 불 보듯 뻔했다. 그 치과는 1분만 늦어도 오고 계시는 중이냐고 전화를 하는, 치밀하고 주도면밀한 병원이 되시겠다. 이름하야 과천연세치과.


5분쯤 후, 앞 유리는 여전히 얼음에 덮여 반짝거렸지만 할 수 없이 출발했다. 가다 보면 녹지 않을까? (간절한 희망 사항) 시내에 도착할 무렵 얼음이 조금씩 녹고 있었다. 어쨌든 시야가 확보되어 다행이었다. 주차빌딩에 차를 두고 병원으로 뛰듯이 걸었다. 아니나 다를까, 전화가 걸려왔다.


"네, 가고 있어요. 거의 다 왔어요."


나는 중국집 사장님 같은 대답을 했다. 15분이나 늦었지만 고맙게도 병원 직원은 나를 나무라지 않았다. 나는 이가 시려서 불소 치료를 받는 중. 총 4회를 받으라는데 이번이 2회째.


치과 치료 중에 이토록 쉬운 게 있을까? 전혀 통증이 없는 데다 단지 5분 동안 기구를 물고 있으면 된다. 충치 치료나 스케일링에 비하면 거저먹는 셈이다.


담 주 진료를 예약하고 얼른 산부인과로 걸음을 옮겼다. 올해 12월 안에 건강보험공단에서 진행하는 정기검진 중 치아와 자궁경부암 검사를 해야 한다. 유방암, 위암, 대장암 등도 해당된다. 유방암이야 매년 정기 검진을 하므로 따로 할 필요가 없고요.


공교롭게도 작년에 내 돈으로 위내시경과 대장내시경 검사를 해버렸다. 덕분에 올해 일이 줄었다. 아니 올해 했으면 돈이 굳었겠구나. 아무튼 산부인과 후엔 내과로 가서 코로나 백신(화이자 2가 백신)을 맞아야 한다. 나는 가능한 일정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 그러고 나서 느긋하게 점심밥과 커피를 즐기려고 했다.


오랜만에 와본 산부인과는 역시나 많이 기다려야 했다. 예약 없는 자궁경부암 겸사만 하는 거라 더 그랬다. 간호사들은 매우 친절했다. 친절과 상관없이 여자라면 누구나 산부인과에 가는 걸 꺼릴 것이다. 나 역시 이 나이 먹도록 마찬가지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그냥 다리 벌리고 눕는 그 자체가 지독하게 싫을 뿐. 몸속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기구의 느낌이 치떨리게 끔찍할 뿐. 그리고 잠깐이지만 엄청 아팠다. 나열하고 보니 '별다른' 이유가 맞네.


내가 "아아!" 하고 비명 비슷한 소리를 내자 의사 선생님은 "아이고 아파서 어떡해요? 제일 가는 기구로 하는데도 많이 아프죠?"라며 위로했다. 세상에, 이렇게 따뜻한 산부인과 의사는 평생 처음일세? 게다가 여자 선생님이라 부담이 훨씬 적었다. 앞으로도 산부인과는 무조건 여기로 와야지, 김지영 산부인과. 나는 어린아이처럼 다짐했다.


12시 30분. 백신을 맞을 내과 예약은 2시였다. 점심으로 돌솥비빔밥을 먹었다. 제주살이 전에 자주 가던 식당인데 맛은 여전했다. 평범한 이 돌솥비빔밥이 그리웠다고요. 1시간쯤 카페에서 노닥거리고 싶었으나 막간을 이용한 볼 일이 남았다.


시내에 있을 때 장을 봐야지. 파리바게뜨에서 호두파이를 샀다. 어제부터 내내 이놈이 눈에 어른거렸다. 파이 박스를 들고 차로 돌아가 뒷자리에 집어넣었다. 다음엔 오케이 마트에 가서 딸기와 밤, 파를 샀다. 역시 차에 던져 넣었다. 세 번째로 생협 매장 자연드림에 들러 우유와 시리얼을 샀다.


편하게 한 군데서 하면 될 텐데 왜 이리저리 가냐고? 가게마다 적절한 상품이 다르니까요. 평소 내가 장 보는 방식이다. 주부라면 대부분 이러지 않나? (아닌가?) 어쨌든 좀 귀찮아도 나만의 방식을 고수한다.


발발발 장 보기를 마치니 벌써 1시 30분! 꿀같은 커피 타임이 겨우 30분 밖에 안 남았네. 그래도 포기할 순 없었다. 이 카페는 이름이 한 번 바뀌었다. '트리플제이.' 당연히 주인도 달라졌겠지. 전부터 단골이었고 여전히 이곳이 좋다. 작고 아담하고 조용하다. 커피 맛이야 물론 합격. 어찌 찾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핸드드립 중 예가체프를 골랐다. 역시 전문가의 솜씨란! 신맛이 풍부하게 우러났다. (나는 신맛이 강한 원두를 선호한다) 집에서 내가 내리면 이 정도로 신맛을 내지 못하거늘. 솜씨일까 원두가 다른 걸까. 아마 둘 다일지도. 나는 창가 자리에 앉아 짧고 굵은 휴식을 누렸다. 



훤히 내다보이는 인도 한가운데 나무 세 그루가 일렬로 서있었다. 잎은 다 떨어져 가지들만 하늘을 향했다. 양쪽 눈길 위로 지나다니는 사람들. 건물의 외벽에 붙은 간판들. 나는 항상 딱 이 자리에 앉는다. 카페는 아주 작지만 바깥이 잘 보여서 답답하지 않거든. 사람들을 구경하며 멍 때리기 안성맞춤.


자 이제 마지막 백신 차례다. 속편한 내과 2시. 그러나 주사를 맞기까지 40분이나 기다렸다. 그저 백신만 맞는 것뿐인데 바로 되는 것 아니었나요? 며칠 전에도 콜레스테롤 검사를 하러 왔었다. 일명 좋은 콜레스테롤 HDL과 나쁜 콜레스테롤 LDL이 둘 다 높은 수치였다.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며 평소대로 약을 먹으란다.


2가 백신을 맞을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다. 요즘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맞지 않는 추세이지 않나. 두 달 전에 남편이 결국 코로나에 걸렸다. 삼사일 아팠고 이후 괜찮아졌다. 문제는 후유증이 지금까지 계속된다는 점이었다. 두통과 어지러움 증상이다. 나는 그걸 보고 겁을 먹었다.


후유증이라면 유방암 치료 이후 십 년 내내 지겹도록 시달리고 있다. 불면증, 고지혈증 등을 달고 사는데 코로나 후유증까지? 난 아직 한 번도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다. 언젠가 내게도 차례가 올 텐데. 며칠 앓으면 되는 코로나 자체보다 후유증이 더 무서웠다.


지난 두 번의 백신 접종 때도 별다른 증상 없이 지나갔다. 2가 백신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란 계산이 섰다. 백신을 맞으면 코로나에 걸릴 확률이 대폭 낮아지고 걸려도 후유증이 덜할 거라 예상했다. 실보다 득이 많을 것 같다는 결론.


티셔츠의 소매를 올리고 있는데 간호사 왈, 팔 하나를 옷에서 완전히 빼란다. 아 그러면 되겠구나. 흐흐흐. 주사야 뭐 따끔하지도 않았다. 간호사 양반 실력이 좋구먼.


병원 순례를 마치고 주차해둔 차를 뺐다. 어머나 3시였다. 그새 4시간이 지났다. 다람쥐처럼 바지런히 돌아다녔네. 집에 돌아와 차 앞 유리에 커버를 덮었다. (작년에 쓰던 것이다) 조금이나마 덜 얼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장을 봤다고 끝이 아니다. 사 온 재료들을 냉장고에 넣기까지 과정이 있다. 파 뿌리는 썰어서 버리고 흰 줄기와 푸른 잎을 따로 잘라 정리한다. 밤을 깨끗이 씻어 한 주먹은 삶고 나머진 물기를 빼놓았다. 장바구니를 접어 서랍에 넣으니 이제야 마침표.


겨우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다. 갑자기 아들이 일찍 퇴근한다고 전화가 왔다. 따뜻한 반찬을 하나 만들어야겠다. 난 벌떡 일어나 두부조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팔이 아프다. 묵직하게 통증이 느껴진다. 내일은 꼼짝 말고 집에서 쉬어야겠다. 이번에도 대충 넘어가 줘야 할 텐데.


아들과 저녁식사 후 디저트로 호두파이를 한 쪽씩 먹었다. 맛나다. 애써 사 온 보람이 있네.

사실 매일 이렇게 바쁘진 않다. 오늘같은 날은 드물다. 요즘 난 노는 재미에 빠져 마냥 노는 중. 드라마 보고 유튜브도 보고 밀린 책 읽고...... 일은 언제 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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