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입술이 부르텄다. 좁쌀 같은 수포가 여러 개 생겼다. 더 번지진 말아야 할 텐데. 자주 겪는 증상이라 별로 걱정하진 않는다. 아마도 요즘 잠을 설쳤는데 그것 때문일까? 지난주 갑자기 초여름처럼 기온이 20도 언저리로 올라갔다. 밤에 보일러를 켜기엔 애매한 날씨. '외출'로 돌려놓자 새벽엔 여지없이 한기가 스며들었다.
서너 시만 되면 선득한 기운에 잠이 깨었다. 옆에 놔둔 얇은 이불을 한 겹 더 덮어 몸을 덥혔다. 그럼 바로 잠이 들어야 하건만. 아침까지 깨어있는 날이 이어졌다. 여덟 시간을 꾹꾹 눌러 자줘야 겨우 운신하는 인간이 바로 이 몸이시다. 너덧 시간 밖에 잠을 못 자니 탈이 난 것이다. 미련했다. 하루 이틀 고생을 했으면 어떡하든 대책을 찾았어야 했다. 대책은커녕 이만한 일에도 잠을 못 자냐며 나는 나를 야단쳤다. 어영부영 일주일이나 그렇게.
미세한 온도 차이에도 예민해지는 신체는 결코 달갑지 않았다. 조금 추워도 조금 더워도 못 자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어디 가서 여행작가라고 말하기엔 차마 하찮은 체력. 매번 짜증과 한숨이 났다. 특별히 힘든 일 없이 단지 잠이 부족하단 이유로 하루 종일 비실거렸다. 유행하는 '미라클 모닝' 같은 건 나에게 천적이나 다름없다. '미라클 굿나이트'라면 몰라도.
순순히 지나가던 겨울이 '도저히 안되겠네' 하며 돌아선 듯 다시 쌀쌀해졌다. 보일러를 적당히 틀고 자니까 오히려 새벽 추위가 사라졌다. 이번 주엔 깨지 않고 잠을 잤다. 아 살 것 같다. 꿀잠을 가져간 것도 돌려준 것도 결국 날씨 자체였다. 나는 나에게 해준 게 아무것도 없었다.
체질은 여리디여린 공주과이나 현실은 억척스러운 무수리 인생. 오 남매의 넷째이자 작은 딸. 태어나면서부터 조연으로 자라온 내가 공주 대접을 받아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나라도 나를 공주처럼 떠받들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된다. 대충 자라, 대충 견뎌라. 나는 내게 친절하지 않았다. 무수리 생활에 만족하라며 자꾸 등을 떠밀었다.
유방암을 치료하던 시절 스스로에게 다짐한 것이 있었다. '소중한 내 딸을 대하듯 나를 대하자.' (참고로 나는 딸이 없다만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나만큼은 내 편이 되자는 다짐. 그러나 점차 잊어간다. 사랑도 변하고 깨달음도 흐려지고 결심도 약해진다. 열역학 제2법칙이라나 뭐라나. 엔트로피는 증가한다나 뭐라나.
몸이 아파져야 '내 딸을 대하듯'이라는 문장을 간신히 떠올린다. 입술이 벌겋게 부르터야 내 몸을 들여다보게 된다. 나의 허약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그렇게 어렵니? 그래, 이 풍진세상에 어울리지 않게 공주 과로 태어났다. 그래서 어쩔 건데? 매번 구박만 할래? 이제부터 공주 비슷하게라도 살아야지. 어떻게? 내가 나를 세심하게 살피고 아낌으로써. 존중하고 대접함으로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