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세 가지 경우의 수

내일, 세 번째 정기검진

by 소율


내일이다.

세 번째 정기검진 날. 두 번째까지는 별생각 없이 마음이 편했다. 그냥 아무 근거도 없이, 괜찮을 거 같았다. 이번은 전보다 신경이 쓰인다. 그동안 운동은 꾸준히 했던가? 음식은 잘 챙겨 먹었나? 스트레스 안 받고 즐겁게 지냈나? 자꾸 점검하게 된다. 


5, 6, 7, 8, 9, 10월까지, 지난 6개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더라? 5월엔 칭다오로 5박 6일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아프리카까지 섭렵한 우리에게는 싱거운 여행이었다. 매일 맛난 중국음식을 먹는 재미로 지냈다. 6월, 7월 두 달 동안은 영어학원에 다녔다. 강남까지 날마다 출퇴근에다 집에서도 복습 두어 시간씩, 무리수를 둔 나머지 7월 말에 넉 다운. 학원 생활은 겨우 2개월 만에 종 치고 말았다. 8월에는 온라인 수업으로 바꾸었으나 갈수록 흐지부지. 9월에 결국 휴지기를 선언. 영어공부는 일단 중단하게 되었다.


중요한 건 9월부터 출판사와 본격적인 원고 작업에 들어갔다는 것. 10월 둘째 주, 드디어 초교를 넘겼고 사진도 보정이 끝났다.


여름에 벨리 댄스를 의욕적으로 시작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9월에 발표회를 한다고 부채까지 등장하니 나로서는 황당할 뿐이었다. 갓 시작한 사람은 아직 엉덩이도 제대로 흔들지 못하는데 뭔 부채 놀이? 10월부터 요가로 갈아탔다. 오른쪽 팔로 무게를 버티는 동작을 하고 나면 어깨가 아파서 조심하고 있다. 아침에 요가를 하고 나면 확실히 기분이 상쾌해진다.


다른 건 문제가 없었는데 음식 챙겨 먹기가 여전히 힘들다. 조금만 일을 해도 어깨와 등짝이 아프니 요리인들 제대로 할 수가 있나. 엄마는 이제 주기적으로 반찬을 만들어 보내 주신다. 엄마 반찬을 다 먹고 나면 매일 ‘오늘은 뭐 해 먹지?’가 큰 숙제다. 날마다 채소를 많이 먹어야 하는데 별로 실천을 못 하고 있다. 암 환자가 이래서 되겠어?라고 자신에게 말해보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 나는 먹는 것보다는 늘 다른 것에 더 관심이 쏠린다. 책 쓰기, 여행, 산책, 그림, 영어공부...... 정말 체질은 공주 과인데 환경이 받쳐주질 않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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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푸른 하늘이 사람을 밖으로 불러내는 날이다. 청명한 바람과 햇살이 어찌나 유혹적인지! 집 근처에 코스코스 밭이 있다. 빈 터인데 시에서 코스코스 밭으로 조성을 해놓았다. 아들과 같이 카메라를 들고나갔다. 몇 주 전만 해도 아직 덜 피었는데 벌써 반쯤은 지고 있었다. 코스모스 밭을 거닐다 커피 한 잔을 사들고 놀이터에 앉았다. 햇볕이 따가웠다가 바람이 서늘했다가 참 기분 좋은 날씨다. 아, 정말 이 순간이 행복하구나.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내일 검사에서 이상이 나오면 어찌할까? 언제라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전에는 닥치면 생각하지 뭐, 이랬는데 막상 그런 일이 또 닥치면. 처음 진단받았을 때처럼 멍하니 아무 생각도 안 날 것 같았다. 미리 한 번 예상 시나리오를 짜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어. 조금 나쁠 경우, 많이 나쁠 경우, 최악의 경우. 정말 하나하나 정신 맑을 때 생각을 해두어야겠다. 이런 게 경계선에 서있는 자의 태도. 근거 없는 낙관도 비관도 아닌, 균형 잡기. 그것이 필요한 때다. 지금이. 


오늘의 일기는 ‘세 가지 경우의 수에 대응하는 방법에 대하여’가 되시겠다.

그건 펜으로 꾹꾹 눌러쓰는 종이 일기장에다 논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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