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엄마 반찬
마흔일곱에도 부모님의 손길은 필요하다!
아침에 엄마 아부지가 오셨다.
반찬 보따리를 바리바리 싸들고서. 충주에서 첫 차를 타셨단다. 부모님이 오실 땐 정해진 순서가 있다. 일단은 충주에서 언니가 사는 안양으로 오신다. 그러면 언니가 부모님을 차에 모시고 다시 우리 집으로 온다.
내가 아픈 이후로 난 '내버려 두어도 알아서 잘하는 딸'에서 '챙겨줘야 하는 안쓰런 딸 1'로 탈바꿈되었다. 언니 역시 형부가 돌아가신 뒤로 '부모님 잘 챙기는 명랑한 맏딸'에서 '챙겨줘야 하는 안쓰런 딸 2'로 탈바꿈된 지 오래였다. 속 안 썩이고 잘 살던 딸 둘이 모두 다시 엄마 치마폭에 감싸 안아야 할 어린것들이 되어 버렸다.
부모님은 딸들 굶을까 봐 종종 반찬을 만들어 들고 오신다. 한동안 아부지도 아프시고 엄마도 몸이 좋질 않아 반찬을 만들어주지 못하셨다. 그게 내내 걸리셨는지 이번엔 기어코 올라오셨다. 나도 엄마 반찬이 아쉬웠지만 대놓고 해달라고는 못하였다. 아픈 줄 뻔히 알면서 어떻게 그러겠는가.
학원을 운영하는 언니가 수업시간 전까지 돌아가야 해서 시간이 많질 않았다. 기실 언니보다 부모님 맘이 더 바쁜 것 같았다. 딸이 늦을까 봐서 한 숨 돌릴 틈도 없이 박스를 여신다. 엄마가 식탁 위에 봉지봉지 싸온 반찬들을 펼쳐놓는 사이, 나는 있는 대로 반찬통을 꺼내 놓았다. 된장, 각종 나물, 돼지고기, 밑반찬, 겉절이 김치, 심지어 썰어놓은 파까지. 텅 비어있던 냉장고가 금방 그득해진다.
그런데도 엄마 아부지는 이구동성.
"뭐 한 것도 없어."
한 게 없긴! 저것들 만드느라 얼마나 시장에 오갔을 것이며 아픈 허리는 얼마나 더 아팠을 것인가. 울 엄마의 소원은 딸들이 엄마 집 근처에 살아서 매일 반찬을 해다 주는 것이다. 멀어서 자주 못 해다 주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한편 그 와중에도 나는 아프다고 하소연을 한다. 요즘 이런저런 일로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위장이 말썽이었다.
1주일째 끓인 밥과 김만으로 연명하던 나는
"나 이 반찬들 지금 먹지도 못해. 요즘 죽만 먹는다니까."
이러면서 부모님 속을 아프게 했다.
"아이고, 그렇게 못 먹어서 어떡하냐!"
부모님이 날 안쓰런 딸로 취급해주니까 나도 어리광 부리는 딸 모드로 돌아가는 것 같다.
바람처럼 다시 집을 나서는 부모님. 뒤에는 불룩하게 채워진 냉장고가 지 배를 두드리고 있었다. 아들과 둘이 하는 점심시간. 돼지고기를 볶고 나물들과 황태 무침을 꺼내 놓았다. 아들 입이 헤 벌어진다. 엄마가 환자가 된 이후로 제대로 반찬을 못해주고 있었다. 실은 환자여서 더 잘 먹어야 하건만 환자여서 예전처럼 오래 부엌에 있질 못한다. 아이러니. 악순환.
아까 침 맞으러 간 한의원에서 원장님과 대화 한 자락.
"왜 이리 금방 낫지를 않을까요?"
"이유가 뭔지 알아요?"
"아뇨, 모르겠어요."
"마음이 위축돼서 그래요. 하하하 많이 웃으세요."
처음부터 한의사는 스트레스로 인한 위장장애라고 했었다. 그래, 늘 원인은 마음에서 온다. 휭 하니 봄바람처럼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그득한 반찬들 때문인지, 엄마 아부지 얼굴을 봐서인지.
아, 내가 뭔가 에너지를 받는 일이 없었구나. 그동안 하루 종일 책만 붙들고 있었고 다른 데 눈 돌릴 여유가 없었다. 내 안의 에너지를 꺼내 쓰기만 하고 어디서 받을 데가 없었다. 울 엄마 아부지가 그 에너지를 주고 가신 거구나. 그래서 갑자기 마음이 환해졌던 거다.
매일 한 가지라도 나를 기쁘게 해주는 일을 해야겠다고 새삼 마음을 먹는다. 그게 공부보다 중요하다. 까짓 거 준비 좀 덜 하면 어때? 가서 부딪치며 열심히 하면 되겠지(필리핀 어학연수를 앞두고 있는 중). 기대 수준을 낮추고 즐기는 데 의미를 두어야지. 왠지 위장도 곧 나아질 것 같은 느낌이다.
엄마 아부지의 힘!
아, 마흔일곱에도 부모님의 손길은 필요하다!
자식은 늙어도 부모님 앞에서 영원히 어린 자식이고 싶은가 보다.
방금 엄마가 전화를 하셨다. 아까 숨도 못 돌리고 돌아선 것이 아쉬웠던 게다. 반찬 하나하나 어떻게 만들었는지, 황태 가시 조심하고, 겉절이는 좀 억세니 그리 알아라, 버스 타고 올 때 휴게소엘 안 들려서 힘들었다, 저녁은 막내 이모네 들러서 얻어먹고 집에 왔다, 아까 너 아프다고 해서 걱정이다, 신경 많이 쓰지 말고 편하게 지내라......
장보기부터 반찬 만드는 과정, 버스 타고 오는 동안 있었던 일, 언니네 집에서 있었던 일, 내 걱정, 온갖 이야기가 펼쳐졌다. 울 엄마가 그러면 그렇지, 수다를 못 떨고 가셔서 할 말이 많으셨던 게다. 길디 긴 톻화는 "공부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무조건 편하게 지내라."로 끝이 났다.
네, 엄마.
무조건 맘 편히 지내도록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