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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이 뭐길래

한국사람에게 김치가 중요하지만 김치만 중요한 건 아니다.

by 소율

<2017년 12월 5일>


'이렇게 간단한 것을!'

김치를 담았던 비닐을 돌돌 말아 접어 쓰레기 봉투 안에 넣으며 한 생각.
아침에 김장 배달이 왔다.
애용하는 아이쿱생협에 김장김치 10kg 3개를 시켰더랬다.
김치통 3개에 널널하게 들어간다.

문득 예전 김장의 추억들이 몰려온다.
시댁 마당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배추무덤을 보고 기절초풍을 했었지.
1박2일을 꼬박 머물며 허리와 팔목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노동을 했지만 찍 소리도 못 했다.
젊고 팔팔한 두 아들은 놀러 나가고 시아버지는 옆에서 일하는 거 구경하시고 시어머니와 며느리 둘이서 전투처럼 해치웠다.
이건 내 생각이고 사실 시어머니는 즐거워 하셨다.
혼자 하던 거 둘이 하니 신이 나셨던 것 같기도 하다.
식구도 적은데 뭐 하러 그리 많이 했을까?
고도로 계산된 며느리 길들이기 작전의 일환이었겠지.

그 뒤로 나는 꾀를 부렸다.
내 김장은 내 집에서 내가 하겠다고.
20포기 김장을 나 혼자 하곤 했다.
시댁 김장을 하기 전 미리 해버렸다.
결국 혼자서 노동을 하기는 매한가지.
처음엔 배추를 집에서 절이다가 나중엔 절인 배추를 사다가 했다.

그러다 수술을 받고 나서는 김장 하기를 아예 접었다.
엄마가 해다 주기도 했고 주로 사다 먹었다.
요즘엔 생협에 미리 주문을 한다.
무농약 재료로 만드는데다 맛도 깔끔하다.
난 100% 만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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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는 언니네 집에서 엄마, 언니, 작은 오빠가 모여서 김장을 했다.
엄마는 우리 것도 같이 하라고 성화셨지만 난 과감하게 거절했다.
이젠 내가 일을 잘 할 수도 없는데 우리집 것까지 보태면 일 양만 늘어난다.
그렇다고 내 대신 남편이 가서 일할 것도 아니다.
작은 오빠는 웬만한 주부보다 집안일과 요리를 잘 하는 사람이지만 남편은 하기도 싫어하거니와 하지도 못 한다.
즉 우리는 내가 가나 남편이 가나 민폐만 된다.

엄마에게 이런 걸 설명해도 엄마는 그저 나만 빠지는 게 서운한 모양이다.
몇 주 전부터 일주일에 두 번씩은 김장 때문에 전화를 하신다.
아이고, 김장이 뭐길래?
급기야 엄마 몫의 김장을 줄 테니 그냥 밥만 먹으러 오란다.
우리 건 이미 주문을 해놨고 엄마 걸 가져갈 수는 없다고 해도 일단 오란다.
결국 김치 한 통, 알타리 한 통을 얻어 왔다.
일도 안 하고 받아 오려니 맘이 편하지는 않았다.
엄마에게 작은 딸이 사 먹는 김치는 '진짜 김치'가 아닌 게다.

엄마 심정과는 별도로 난 언니네도 오빠네도 자기 김장은 자기네가 알아서 했으면 좋겠다.
못 할 것 같으면 사먹으면 된다.
물론 집에서 하는 김장이 가장 맛있고 돈도 적게 든다.
생협이든 어디든 해먹는 것에 비할까?
하지만 그 '맛과 돈'을 조금 포기하라는 거다.
좀 덜 맛있고 돈좀 더 쓰면 어떤가?
80대 노인네들을 데려다 일을 시키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김장하는 이틀 동안 얼마나 잔심부름을 하셨는지 아부지 눈이 쾡 하고 김장을 진두지휘한 엄마는 허리를 못 펴신다.
자식이 도와달라 부르면 좋다고 오시지만 그 끝은 항상 몸살로 이어지니.

11월 중순경부터 12월 초까지의 몇 주간은 어디를 가나 김장 때문에 난리다.
시댁에 혹은 친정에 김장을 하러 가야 하네, 마네...
어디서 한 통을 얻어왔네, 사왔네...
하고 싶어서 스스로 하는 거면 괜찮지만 우리는 아직도 너무들 먹는 거에 목숨을 건다.
부모님 세대야 그렇다 쳐도 아직 늙지 않은 우리까지 그럴 필요가 뭐 있나.
나도 빵보다 밥이 좋고 김치도 많이 먹는 사람이지만 아침밥 안 먹으면 큰 일 나는 줄 알고, 김치 안 먹으면 큰 일 나는 줄 아는 사람들,
답답하다.

한국사람에게 김치가 중요하지만 김치만 중요한 건 아니다.
세상은 넓고 먹을 것은 많다.
사람에게 먹는 것이 중요하지만 먹는 것만 중요한 건 아니다.
세상은 넓고 다른 일도 많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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